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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조각

내 안의 시인을 깨우는 영화 '일 포스티노'

온화수 2014. 6. 11. 16:13

나는 글이 좋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진 않았다. 대학교 졸업할 때쯤 취미가 붙어 미친 듯이 좋아졌다. 그래서 못 쓰는 글에도 재미가 붙고, 글을 닥치는 데로 읽었다. 공허해지는 시간이 오면 글로 틈을 메워야 안심이 됐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얼마 전에야 이해가 됐다. 이 말 나 스스로 하는 건 다소 웃기는데, 텍스트 중독인 것 같다.


심리학과 같은 실제 내 삶에서 대입해보고 활용할 수 있는 책들을 좋아했다. 아니면 현실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설을 많이 읽었다. 시와 소설은 좋기는 하지만, 직접 내 삶에 그때그때 실용적이지 않은 것 같아 멀리했다. 가끔 읽는 시는 좋지만, 경험이 적은 내겐 이해가 부족하니 재미가 적고, 소설은 감동하기까지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시간을 내서 읽었지만 후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관심이 적었던 게 아닐까.


안도현 시인의 산문집을 보다가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멋진 시를 보고 매우 매우 감동했다. 이 시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지 않았느냐며 물어왔단다. 영화에 나오는 이탈리아의 한적한 바닷가 풍경과 시의 분위기가 아주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를 쓸 때만 해도 이 영화를 모르고 있었다고. '바닷가 우체국'이란 시를 소개한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치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와 같은 구절은 참으로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부드러우면서도 매서운 표현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 우체통에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린다는 표현도 상상해보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가. 시인의 힘은 대단하다.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봄바람처럼 살살 간지럽혔다가 때론 태풍처럼 온 가슴을 휘저어 놓는다.


이제야 영화 얘기를 한다. 일 포스티노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내 안의 시인을 깨우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 어부의 아들 마리오는 어부가 되려고 했지만, 적성이 도무지 맞지가 않다. 영화를 보고 나와 우연히 구인광고를 보고 우체부가 된다. 그 일은 이 작은 섬마을에 망명 온 네루다에게만 전달하는 임시직이었다.


천재적인 시인 네루다는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많은 우편을 받는다. 그걸 의아하게 느낀 마리오는 인기를 끌고 싶었는지 네루다에게 관심이 간다. 그러다 네루다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시와 은유의 세계를 만난다. 또한, 마리오는 술집에 서빙을 하는 아름다운 베아트리체 루소에게 반하게 된다.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당장에 달려가 병에 걸렸다며, 하지만 이 아픔을 치료하고 싶지 않다며 털어놓는다. 사랑에 빠졌다고.  


-마리오가 베아트리체 루소에게 반해 흥분해서 네루다에게 고백하는 대사



파블로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전 사랑에 빠졌어요.


심각한 일은 아냐, 치료약이 있어


아니요, 치료약은 없어요! 치료되고 싶지 않아요.

게속 아프고 싶어요. 전 사랑에 빠졌어요.


상대는 누구지?


이름은 베아트리체


아, 단테로군.

단테도  베아트리체를 사랑했지.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네.


전 정말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 얘긴 이미 했어. 어떻게 할 건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나는 노인일 뿐인걸.


그녀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면,

쳐다만 볼 뿐 말이 나오지 않아요.


아직 말도 붙여보지 못한 거야?


그런 셈이죠.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걸요


첫눈에 반한 거야?


아니요, 

한 10분은 쳐다봤을 거에요.


그 여자는?


그녀는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여자 처음 봐요?'


그래서 자넨 뭐라고 했나?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한마디도? 단 한마디도 안 했단 말이야?


한 마디도 안한 건 아니죠.


아..다섯마디는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당신의 이름이 뭐죠? 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베아트리체 루소"라고 대답했어요.


당신의 이름이 뭐죠. 이건 세마디인데 그럼 두 마디는?


'아,, 베아트리체 루소...' 라고 혼잣말을 했죠.


어마어마한 감동이 밀려왔다. 다섯 마디를 나눴는데, 마지막 두 마디가 '아,, 베아트리체 루소...'라고 혼잣말을 한 거라니.. 이 자체가 시였고 많은 걸 담고 있는 은유였다.

마리오 역인 마시모 트로이지는 영화 촬영을 끝내고 이틀 후 사망했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그는 운명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도 있었기에 더욱 화제가 됐던 것 같다.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정말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아픈 영화지만 그 아픔이 그리 깊지 않고 시처럼 은은한 아픔이다. 느끼는 게 많을수록 많은 아픔이 도사리고 있지만.

<베아트리체와 마리오>




일 포스티노 (1996)

The Postman 
9.5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출연
필립 느와레, 마씨모 트로이시, 마리아 그라찌아 꾸치노타, 레나토 스카르파, 린다 모레티
정보
로맨스/멜로 | 이탈리아 | 108 분 | 199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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