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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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유/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온화수 2014. 7. 16. 22:29

이병률 작가를 알게된 건 얼마 전 떠난 여자친구를 통해서였다. 2~3달 정도 전이었나? 오빠는 글이 너무 딱딱하다며, 이런 글을 써보라고 블로그 링크 글을 알려줬다. 보니 이병률이란 작가의 끌림이었나, 이 책이었나. 기억은 자세히 나지 않지만 그냥, 글이 내게 훅 왔다.


참 좋다고 생각하고 기억해뒀다가 이 사람의 책을 한 번 사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잊었다. 읽어야할 책들, 그 중간중간에 내 마음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새로운 책들이 많았기 때문에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한 달 조금 넘었나. 나름 진지한 미래를 그리며 꽤 오래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이별을 맞았다. 숫기가 없어서 20대가 돼서야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다. 20대 초중반, 후반 조금 못 미치는, 거의 20대를 그녀와 보냈기 때문에 고통이 꽤 컸다. 아직도 화가 난다. 아직까지 미움이란 감정이 있으니 좋아하나 보다.


이별의 아픔이 한 달이 지나니 책이 슬슬 눈에 들어왔다. 그 전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책도 답답해서 못 봤는데. 첫 이별의 후폭풍으로 이성적으로 잡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놓아버렸다. 미련도 하지. 그 덕분에 나는 현실을 심히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뭐든지 여자친구와 함께했는데,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라니 마음이 정말 약해졌다. '내가 아직 애구나.'를 절실히 느꼈다. 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눈치 안 보고 선택할 수 있으니, 이제야 내 삶을 제대로 내 감정대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너무 주저리 주저리.. 어디다 하소연할 때가 없다.. 친구들 앞에서도 한 두번이지..


하여튼, 이별 후폭풍이 조금 잠잠해지고, 전 여자친구 얼굴이 떠올라도 울컥하지는 않게 됐다. 그러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는데, 우연히 전 여자친구가 소개해줬던 그 작가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이 책을 사게 됐다.

 


   

이 저자분이 라디오 작가 출신이라는데, 새삼 라디오 작가란 직업에 관심이 살짝 갔다. 방송 작가는 주로 드라마나 예능 쪽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디오 작가라니. 겉으로만 보기엔 감성적이고 왠지 근사한 직업이다. 모든 일이 실제론 상상과 다르지만.


이 책은 여행산문집이다. 작가가 다양한 국가들을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느낀 점을 감성적으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풀어낸 글이다. 


사실, 출판계가 어렵기 때문에 약간은 과장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써서 책 판매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더이상 글을 못 이어나가겠다. 그냥 느낀대로 솔직하게 쓰겠다.


한 편씩 에세이를 모아놨으니, 각자 글마다 당연히 마음에 오는 글도 있고, 내게 재미없는 글도 있다. 내가 광고를 배워서 그런지 뒤집는 글이나 낯선 글을 기대했던 것 같다. 읽으면서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지는 글들도 꽤 있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잘알지 못하고 고른 것 같았다.


산문 글보다 짧은 시 형식의 글들이 내게는 더 좋았다. 



10#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에는 파도가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 받기엔 바람 부는 날이 좋다.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한 장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 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13#

나는 너를 반만 신뢰하겠다.

네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너를 절반만 떼어내겠다.

네가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4#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 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누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외롭고, 목이 마른 이유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당신이겠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더욱 좋은 글들이 책에 상당히 많다. 긴글도 많고. 이병률 작가님은 라디오 작가보다는 시인을 하시는 게 적성에 맞으시는 것 같다는 주제 넘은 생각을. 그냥 내게는 짧은 광고 카피 같은 글들이 책 안에 있는 긴 글보다 훨씬 좋아서요. ㅠㅠ 이 글을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하기에도 민망하고 그냥 '독서 수다' 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다. 그래야 도망갈 구멍이 생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