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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 김수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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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 김수영

온화수 2014. 8. 4. 00:46

난 시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 잘 모른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 누군가의 글을 읽어봐라, 하면 읽는 식이다. 정치나 사회 역사적인 배경에서 김수영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길래 읽어봤다. 사실, 처음에 몇 개 읽었을 때는 한자도 많고 시대와 동떨어진 느낌도 있고 해서 지루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나도 모르게 김수영 시인의 문투를 따라하고 있었다. 짧은 일상을 전하더라도 김수영 시인을 닮고 싶어졌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 1 시편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시들을 기억하고 싶어 남긴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1947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먼 바다를 건너온

용이하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온 것이다

주변 없는 사람이 만져서는 아니 될 책

만지면은 죽어버릴 듯 말 듯 되는 책

캘리포니아라는 곳에서 온 것만은

확실하지만 누가 지은 것인 줄도 모르는

제2차 대전 이후의

긴 긴 역사를 갖춘 것 같은

이 엄연한 책이

지금 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다

어린 동생들과의 잡담도 마치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괴로운 잠을

이루울 준비를 해야 할 이 시간에

괴로움도 모르고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

그저 멀리 보고 있는 것이 타당한 것이므로

나는 괴롭다

오ㅡ 그와 같이 이 서적은 있다

그 책장은 번쩍이고

연해 나는 괴로움으로 어찌할 수 없이

이를 깨물고 있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동맥(冬麥) - 1958년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광선의 미립자와 분말이 너무도 시들하다

(압박해 주고 싶다)

뒤집어진 세상의 저쪽에서는

나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타락도 안했으리라


그러나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싯퍼런 작열의 의미가 밝혀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


햇빛에는 겨울보리에 싹이 트고

강아지는 낑낑거리고

골짜기들은 평화롭지 않느냐 ㅡ

평화의 의지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달밤 - 1959년 5월 22일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찹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 ㅡ

달 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하…… 그림자가 없다 - 1960년 4월 3일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 그림자가 없다


… 그렇다

…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죄와 벌 - 1963년 10월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죄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ㅡ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절망 - 1965년 8월 28일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1965년 11월 4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적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밝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으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성(性) - 1968년 1월 19일


그것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1968년 5월 29일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