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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작가 김훈 "나는 왜 쓰는가"

온화수 2014. 11. 3. 05:08



전문 링크: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31/2014103103307.html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문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글이나 말하기, 언설 행위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려는 목표가 없다.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향이 전혀 없다. 그리고 나의 논리 앞에 남을 대령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말을 가지고 남과 정의를 다투려는 의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느냐. 나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쓴다. 내면을 드러내서 그것이 남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으면 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반드시 소통이 되고 너와 내가 얼크러져야만 훌륭한 것은 아니다. 너와 내가 소통이 안되고 피차의 차이와 상이점을 아는 것도 아주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배경이다. 나는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적이 없다. 나는 젊었을 때 나는 ‘나중에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글을 써야지’ 하는 예술적 낭만과 로맨틱한 목표를 갖고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할 생각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74년에 신문기자가 됐는데, 어떤 사람은 물어본다. 왜 기자를 했냐고.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장황한 대답을 하는데, 나는 육군을 제대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길바닥을 헤매다가 취직한 거다. 언론의 지도자가 되고 사회의 목탁이 되고 여론의 리더가 되기 위해 신문기자가 된 것이 아니다. 길바닥 헤매다 취진한 거다. 거기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꼭 훌륭한 목표를 세워 놓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고 목표를 설정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나의 내면을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왜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나의 글로 남을 설득하고 진리를 얘기하고 나의 명석함을 증명하려는 이런 욕망이 나는 없다.

 

소설에서의 문장은, 첫 문장이 힘이 있어야 한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의 힘은 간단명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어+동사’다. 아름다운 수사학에서 힘이 나오는 게 아니다. ‘주어+동사’의 놀라움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걸 이순신에게서 배웠다.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난중일기,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 그런 데서 배웠다. 이것은 군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문인이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주어+동사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유의 세계, 결단력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를 많이 죽인다. 7년 동안 120번 정도의 군법을 집행한다. 죽이지 않으면 곤장을 치고 감옥에 보내고 강등시켰다. 군율을 어겼을 때에도 ‘거듭 군율을 어겼다, 군율을 어겨 베었다’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지저분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군율을 어겨 베었다’고 썼다. ‘목을 잘라서 성문에 걸었다’ ‘오늘 남원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있었다’ 이런 단순성이 갖는 문장의 힘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문장의 힘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두어 페이지 넘어가면 이 힘이 빠진다. 그럼 또 강한 문장을 갖다놔야 한다. 그럼 거기에 의지해서 십여줄이 나가는 것이다. 중간중간에 힘찬 문장을 박아놔야 한다. 문장 하나 가지고 오래 가지를 못한다. 첫 문장으로 끝까지 우려먹고 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