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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된 문장들, <힐링> - 박범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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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된 문장들, <힐링> - 박범신

온화수 2014. 12. 18. 01:38

제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서, 근사한 문장을 보면 설레고 따라하고 싶고 그럽니다. 책을 계속 읽다보니 저는 시보다도 소설 같은 형식의 주저리 주저리 글이랄까. 그런 문장들이 더 좋더라고요.

 

소설을 읽으면 스토리 안에 무릎을 치는 문장이 겨우 한 두개 녹아있는데, 박범신님의 '힐링'은 감성적인 문장들이 모여 있어요. 아마, 이 책을 읽으시면 박범신님의 책을 안 사신 분이라도 소설 하나를 사실지도 몰라요.

 

  

'힐링'이란 단어가 어느 순간 부정적으로 바뀌어갔던 것 같아요. 힐링 열풍이 불다가, 너무 아프니까 청춘이라니까, 제도는 개선되지 않고 할 수 있다, 괜찮다, 위로만 하니까. 반감이 생겼다랄까요. 뭐. 책 제목은 맘에 안 들지만 내용은 좋아요.

 

이 책은 밀실의 책상에 앉아 쓰신 글이 아니래요. 천지사방 열린 길 위에서 쓰신 글이래요. 그래서 소소하지만 얕지도 않아요. 무겁지 않게 책장을 빨리 넘기게 되지만, 자기 자신을 곱씹어 보게 하는 매력이 있어요.

 

박범신님의 글을 보면 한자어나 상투적인 단어를 꽤 쓰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문체는 되게 젊고. 이 상반되는 두 가지가 묘하게 어울려요. 그게 작가님만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밑줄


내가 아직도 글을 쓰는 것은

그리운 것들이 항상 멀리 있기 때문이다.

꿈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거짓일는지 모른다.

이루어진 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멀고 먼 별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무엇으로 영혼의 품격을 증명해 보이겠는가. -16쪽

 

 

세상 싸가지 없다 느낄 때 있더라도 '아냐, 더 좋아질 거야'라고 나는 쓰고 싶다. 내가 진술하는 건 상처투성이 자갈밭 이야기지만 아니다, 나는 여전히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꿈에 대해. 앞날에 대해. 행여 무위해질까 봐 자주 두렵지만 그래도 나는 내 문장 하나, 믿는다고 한사코 우기고 싶다. 문장은 힘이 세다고 믿고 싶다. -32쪽

 

 

요즘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안전한 인도만을 따라 걷는다. 그들은 표지판이 없는 새 길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세상이 들려준 생산성이나 효용성의 등불을 하나씩 들고 그것에 의지해 길을 걷고 있다. 그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라는 것조차 그들은 잘 모른다. 아, 불쌍한 오늘의 젊은이들.

 

예전엔 목표가 꿈인 줄 알았다. 아니다. 꿈은 목표 너머에 있다. 의사가,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꿈이랄 수는 없다. 그건 목표에 불과하다. 의사가 되면, 국회의원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나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 그 이상이 꿈이다. 목표 너머의 비전이 없는, 내 기득권을 위한 출세는 더럽다. 오로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살자고 꾸는 꿈이라면 젊은이여, 차라리 꿈꾸지 말라. -42쪽

 

 

아내의 자랑은 자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이 더 손해잖아!" 내가 말하면 아내는 웃는다. "아니야. 내가 더 나아. 더 행복해." 아내는 사랑의 끝에 사랑이 있다고 아직도, 여전히 믿는다. 놀랍다. 나는 사랑의 끝에 겨우 깊은 우의가 남더라고 말하고 다닌다. 아내보다 리얼하지만 아내보다 급수가 낮다. -56쪽

 

 

울지 않으니

화내지 않으니

말하지 않으니 네가 아픈 거야.

후회하게 될까 봐 두려워

네가 한사코 감정을 감옥에 가두는 걸 보면

가슴 아파.

생은 생각보다 짧거든.

슬프다고

화난다고

내 가슴 뜨겁다고 말하고 살아.

그게 웰빙의 삶이야. -82쪽

 

 

아, 나는 더 깊어져야 돼.

더 고요해져야 돼.

나의 내부에 있는 소음을 제거해야 돼.

내가 버렸을지 모를 청춘의

저 순혈주의적 비전을 찾아 가져야 돼.

필요한 건 순정이야.

 

제발 기웃기웃하지 마라.

지금 그 길 가라.

'성공'을 목표로 계산하지 마라.

내적인 열망으로 그리운 그 길로 한사코 가야

나를 구할 수 있다. -112쪽

 

 

청춘에 내 속엔 어둠 가득했어.

내 눈이 빛나고 있는 줄 몰랐지.

그게 젤 후회돼.

내 안의 빛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거. -149쪽

 

 

오로지 문학을 믿어서 오로지 그 길을 가는 건 아니다. 다른 길보다 낫다는 믿음이 첫째, 다른 길보다 사랑하기 때문임이 그 둘째, 다른 길보다 더 열심히 걸을 수 있다는 나만의 황홀이 그 셋째다.

 

작가는 치대한 명징하게 설명하려 하지만 많은 경우 언어는 너무 한정적이다.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넓은 테두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다 말고, 침묵으로 쓰는 소설은 없을까 생각한다. 오늘은 언어의 한정이 고통스런 날이다.

 

아무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문장이 줄줄이 떠오를 때보다 재미도 없고 안전하지만 최소한 '죄'와 '뻥'은 적다는 생각.

 

문장이 문장을, 말이 말을 줄줄이 불러오는 거, 신명 나지만 안 좋아. 생각이 문장을 불러오도록 기다려. 머뭇거리는 습관, 그게 짱이야. -311쪽

 

 

날 작가로 키운 8할은 자학인지 몰라. 외부세계와의 불화가 자학으로 돌아와 내부분열 만들어. 그럼 늘 위태론 상태가 되고, 글 쓰는 강력한 추동력 생기지. 내 길이 왕도라고 말하진 않겠어. 분명한 건 위태롭지 않으면 창조적 상상력은 잠잔다는 거! -322쪽

 

 

어떤 사람들은 말해.

당신의 감성이 부럽다고.

감성은 면도칼과 같아서

자주 제 자신의 속살을 벤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야.

형벌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야.

필요한 건 무심해지는 거야.

그게 가장 큰 지혜야.

난 멀었어. -343쪽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뭔가 떠오를 때 책상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것이 헌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뻔한 '사교계'에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하소로 시간을 낭비한다.

그런 사람은 기실 쓰지 않는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에 억압돼 있을 뿐이다. -348쪽

 

 

가까운 사람보다 먼 바다가 그리울 때 있지.

바다보다 또 수평선 너머가 더 그리울 때 있지.

더 먼 것을 향한 그리움이 바로 상상력의 발화지점이지.

그러니 간절해야지.

간절하면 생의 사소한 것들,

절로 경이로워지거든.

꽃 한 송이도 갈망으로 피는 것일 게야, 아마. -3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