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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말하다> - 김영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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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말하다> - 김영하

온화수 2015. 6. 3. 10:09

우린 변종이 되어야 한다.

 

평범하지 않은 변종. 여러 문화가 섞인 변종. 다양한 생각. 시각. 그런 시각을 가진 소설가인 김영하. 그의 소설은 흔히 생각하는 한국적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미쿡과 섞인 오묘한 느낌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제 그의 산문인 '말하다'를 구입했다. 이 책은 삶, 문학,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을 풀어 놓았다. 김영하 작가가 근래 강연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했던 말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말이란 게 글보다는 정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작가 자신도 책 끄트머리에 의도와 다르게 편집된 부분을 다시 정리했다고. 관련 강연들을 유튜브에서 몇 가지 보았다고 해서, 구입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언급했듯 의도와 다르게 편집된 부분이라던가. 곱씹어 볼 부분이 많아서, 소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차례에 관련 영상이 적혀 있으니 찾아보고 마음에 와닿는다면 서점으로 가보세여. 삶에 관한 얘기를 처음에 하는데, 자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몇 년간 취업준비 하면서 알바하며 생계 유지하는 분들이 많다고. 그런 평탄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책을 읽는다는 건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보루랄까. 그런 말들을 언급한다. 공감가기도 하고. 나약한 내면을 지키기 위한 종이로 된, 비 내리면 젖는 방패 수준이랄까. ㅠㅠ...

 

자신이 작가가 된 계기도 얘기하고,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말한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낙관주의가 무너지면 한없이 무너진다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되, 그 안에서 나만의 즐거움을 찾으라고. 지금은 부유하지 않는 이상, 성공하기 어려울 거라고. 하지만 돈이 없고 버거워도 그 안에서 내면을 견고히 다지자Go.

 

 

예술자가 당장 되자! 우린 누구나 어릴 때 예술을 하며 즐거워했다. 벽에 낙서하고 찰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실로폰을 몰라도 두드리고. 우린 커가면서 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밌던 예술도 시험을 보고 평가 받기 시작하면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칭찬하는 재밌던 잊었던 예술을 해야 한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닌 만들어내는 사람이 많아져야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보다 앞서 새 길을 뚫는다! 현대건설 사장 같은 말투다... 경제력과 기술력으로는 나름 선진국과 비슷해졌지만, 생각하는 힘, 스스로 개척하는 힘은 많이 뒤쳐지는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 중 인상 깊었던 건 제일 마지막 부분이었다. 무언가 뒤섞인 지점에서 새로운 게 나온다는 것. 소설을 쓸 때, 알게 모르게 정해진 규약(?) 같은 게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걸 깨는 사람이 앞으로 주목을 받을지 모른다고. 하루키 같은 미국 소설 같으면서도 일본 분위기가 풍기는. 열심히보다 이상해야 한다.

 

 


밑줄 긋기 

 

  어떤 글은 미사여구로 잘 꾸며져 있고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제가 군대생활을 헌병대 수사과에서 했는데, 영창 수감자들의 일기를 매일 받아서 책으로 편집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수감자들이 글을 잘 쓰는가 하면 중형을 받은 범죄자들이었어요. 군대에 와서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중형에 처해진 수감자가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이 글을 제일 잘 썼어요. 다른 이들은 의무적으로 쓰라고 하니까 반성문처럼 썼는데, 그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들은 각각 무기와 25년형을 구형받았거든요. 나중에 15년, 5년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적어도 구형은 그렇게 받았어요. 그들이 그런 구형을 받고 돌아와서 쓴 글들이 있어요. 지금 스물 두 살인데 빨라서 마흔 살이나 돼야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자기 운명을 생각하고 쓴 거죠. 그 순간만큼은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직면해서 쓴 것이거든요. 이런 글들은 힘이 있고, 진실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121P

 

  수원의 저소득층 거주 지역의 많은 젊은이들이 지역에 있는 사단에 방위로 배속됩니다. 생계 때문에 낮에는 방위병으로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웨이터로 일하는 이들도 있었고 조폭의 조직원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범죄나 사고에도 쉽게 노출되어 제가 있던 헌병대로 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이들을 만나며 깜짝 놀란 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10대 후반이면 이미 동거에 들어가고 결혼식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양가의 부모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동거를 받아들이고 간단한 가재 도구를 마련해 이들을 독립시킵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중산층의 위선적 윤리는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열입곱 살이 넘어서도 집에 붙어 있는 자식들은 심각한 압력에 직면합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모들은 밥만 축내는 아이들을 갖은 방법을 동원해 집 밖으로 '방출'합니다. 그후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자연스럽게 끊어집니다. 이런 삶들은 수도권의 위성도시들과 서울의 특정 지역에 이미 일반적인 삶의 형태로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에 중산층적인 모럴은 거의 완벽하게 붕괴돼가고 있었고 가족 제도는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비상구」를 쓰게 된 계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이 '보이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 쓰고 싶다, 아니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습니다. 1990년대 한국문학의 인물들은 대부분 지식인/중산층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상구」가 쓰인 지 벌써 10여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들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문의 사회면에나 잠깐 등장했다가 잠깐의 개탄 속에 다시 사라질 운명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20여 년 전 수원의 '보이지 않는 인간'들은 이후 중산층들이 겪게 될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인 가구의 급증, 희망 없는 미래, 자살률의 폭증, 관계의 단기화, 폭력의 일상화 같은 것입니다.

  요즘 한국의 중산층은 자녀들이 폭력에 노출되었다고 비명을 질러댑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진행되며 수면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도시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고 폭주하는 아이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인물들은 어쩌면 우리가 미래에 마주하게 될 도시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만 암담한 것은 아니니까요. 중산층의 눈을 가려온 가짜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도시는 순식간에 정글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2011년의 영국 폭동이 잘 보여줍니다. 상점을 약탈한 것은 처음에 어림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영국 토박이들로, 그중 상당수는 잘 교육받은 중산층의 자녀들이었습니다. -221~22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