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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윤성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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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윤성근

온화수 2015. 7. 31. 12:38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인상이 50일이 지나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글도 문장이 매력적이지 않거나 다음 문장을 궁금하게 만들지 않으면 몰입도가 떨어진다. 더구나 요즘처럼 영상에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짧은 호흡의 글을 선호하는 시대에 첫 문장은 더더욱 중요하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은 저자가 첫 문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23가지의 소설을 예와 함께 생각을 풀어 쓴 책이다. 카프카 <변신>, 이상 <날개>,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보코프 <롤리타>,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사르트르 <구토>,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등등...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의 첫 문장 

 

23가지 첫 문장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였다. <롤리타>와 같은 이마 위에 곧바로 그림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문장도 좋지만, <말테의 수기>처럼 심심하면서도 평범한 문장으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 말을 하는지, 눈 앞의 그림이 아니라 내용의 그림이 그려지는 문장을 나는 더 선호한다.

 

<말테의 수기>의 경우, 이곳으로 살기 위해 오지만,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고 했을 때, 도시의 경쟁을 떠올렸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게, 첫 문장을 바탕으로 내용이 이어지고, 사색할 수 있는 저자의 생각이 이어지면서 빠져들었다. 위 사진은 멜빌의 <모비딕> 부분인데, 저 글은 소설가에게만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목표에 다가가는 법을 알려준다. 사랑하는 것, 신념을 내걸 수 있는 것을 찾았으면,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그저 그걸 매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