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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강신주 지음 김서연 만듦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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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강신주 지음 김서연 만듦

온화수 2015. 8. 29. 08:41

 나는 김수영처럼 살 수 있는가. 지위와 권력에 굴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며칠 전 이어령 선생님이 나온 프로그램을 보고 혼란이 생겼다. 이어령 선생님께서는 일본을 품고, 그들과 함께 그들의 군국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일본 국민들도 군국주의의 피해자라고. 


광복절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도, 일본이 지배했던 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기뻐할 날이라고. 일본 국민들도 나라를 위해 남편, 아들들을 희생해야 했으니까. 


 

   이어령 선생님은 자신도 저항하는 문학을 많이 썼지만,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품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을 바라보자면, 꼭 절실하게 저항을 해야 하는지, 서로의 타협점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저항한다고 거인들을 이길 수가 있는가. 물론, 눈앞에서 세상이 바뀌진 않지만, 오래 전 역사와 비교해보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걸 알 순 있다.

 

  모르겠다. 문학이나 넓게는 예술 분야가 대중들의 관심을 사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대중이 자신들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알 수 없는 문체와 표현들로 벽을 친다. 대중과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는 예술가들은 비주류 취급을 받기도 한다.

 

  너희는 속된 것이라고 속으로 폄하하면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지 못하면 열불내는 게 예술가 아닌가.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뻔한 표현들로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또한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겠지. 모르겠다. 모르겠어. 어디서 어떻게 타협해야 하는가, 아니면 옛날의 저항 정신으로 그대로 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인가.

 


  청년의 철학과 대학원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다. 특히 청년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글을 쓴다고 해도 사랑받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이었다. 대학원 첫 학기, 청년은 아직도 철학이란 학문에 적응되지 않아서인지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처럼 철학 논문을 쓰려고 애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각 과목을 담당한 교수들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자신감 때문인지 청년은 그 다음 학기부터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쓰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의 연구 성과를 요령 있게 정리하고 그것을 나의 생각인 양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청년은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담은 글은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모방한 사람이 사랑받는 것일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썼을 때, 사랑받았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다음 학기 청년의 글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과 글은 사랑받지 못했고, 남의 생각과 글을 모방하면 사랑받았다. 특히 교수 자신의 글이나 교수가 좋아하는 철학자의 사상을 인용하고 따르면 청년의 글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청년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청년은 과거 위대한 철학자들이 동시대에 얼마나 폄하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니체마저도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현실에 직면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니체는 니체고 청년은 청년일 뿐이다. 자신의 생각이 니체의 그것처럼 위대하다는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청년은 니체처럼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 니체는 자신의 생각과 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남의 생각에 따르는 순간, 자기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자신이 따르는 사람의 사상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배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깊게 절망하고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니체처럼 자신만의 생각,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글로 사랑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청년에게 마침내 위기가 온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이 항상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움과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 1994년 늦가을 위기의 순간에, 청년의 손에는 구원처럼 한 권의 작은 시집이 주어진다. 문학을 좋아한 어느 선배가 선물로 준 민음사에서 출간된 김수영의 시선집 <<거대한 뿌리>>였다. 청년은 시집을 넘기다가 <달나라의 장난>이란 시를 읽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가"라는 구절에 이르러 청년은 들고 있던 시집을 무릎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 나만이 아니다. 김수영도 스스로 자신의삶을 살아 내려는 그 서러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구나." 처음으로 청년은 타인의 글로 제대로 위로를 받았다. 비슷한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더군다나 온갖 시련에도 자신의 글을 완성하려고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청년은 누구도 받기 힘든 커다란 위로를 받은 것이다.

 

  만약 김수영을 만나지 못했다면 청년은 철학도, 글쓰기도 접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도는 힘으로 살아가다 보면 어차피 몰이해와 저주는 불가피한 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자기만의 생각은 담은 글을 쓰려는 사람의 긍지 아니겠는가. 청년은 석사 과정을 거치면서 약해질 때마다 김수영을 생각했고 그의 시를 읽었다. 박사 과정을 다닐 때 청년이 김수영을 다시 읽고 있다면, 그에게는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김수영은 청년에게 하나의 멘토로 남아서 그의 곁을 지켜 준 든든한 선배였다. 교수들과의 충돌할 때, 동료 학자들의 오해를 받을 때,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때, 대중들의 몰이해에 직면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 남겨졌다는 고독에 무서울 때 청년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에게는 김수영과 그의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395~397P 

 

  책의 한 부분을 받아적고 나니 생각이 바뀐다. 흔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되, 사랑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살려고 해야할 것이다. 페이스북에 나름 권위 있는 사람들과 친구를 맺으면서, 그들보다 내 생각이 수준 낮다는 생각에 글을 안 쓰게 된다.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내 생각이 공격 당할까봐 두렵기도 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감내해야 한다. 생각의 정답은 없지만, 사랑받는 생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