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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표정들

온화수 2016. 2. 4. 02:33

도착한 곳은 서울 북쪽의 한 고시원이었다. 요즘엔 나름 시설이 세련된 고시텔이라고도 불리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정말 고시원 중에서도 최악의 고시원이었다. 침대 시트는 스프링이 휘었는지 굴곡져 있었고, 냄새도 요상했다. 벽엔 바퀴벌레 한 마리가 천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의 사진이었다. 외할머니는 고시원 근처의 강변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K는 혼자 거주하고 있던 외할머니의 고시원 짐을 정리해야 했다. 그는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총무에게 물은 후 기웃거리며 찝찝한 화장실 손잡이를 몸쪽으로 당겼다.   


찬 공기가 먼저 느껴졌고, 소변과 나프탈렌이 섞인 불쾌한 향이 코를 찔렀다. 숨을 막고 힘들게 소변기 앞으로 다가갔다. 소변기 아래엔 노인의 새치 같은  힘없는 잿빛 털들이 2센티는 될 만큼 쌓여 있었다. '남자 화장실이지만, 여기만 보아도 뻔하다. 외할머니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셨을까. 자존감을 지킬 수가 없는 환경인데.' 그는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바른말만 했던 사람이었다. 엘리트였고 그 옛날에도 여성이지만 관직을 맡았었다.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은 쫓겨났고 자존감을 지키기 힘들어지며 홀로 신음하다 사라지는 융통성 없는 존재.  


외할머니는 나와서 점을 보았다고. 얼마나 굴곡진 인생이었을까. 삶이 혼란스럽거나 불안하면 세계를 알고 싶어 지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니까.   


K에게 그의 엄마는 그런 이야기들을  해왔다. "나는 너의 외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떨어져 지냈어. 어릴 적엔 아버지와 살다가, 돌아가신 이후, 먼 친척집에 맡겨 자랐었고." 그의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을 수 없었다. K가 어릴 적에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쩌다 집에 오시면 엄마는 화를 내고 쫓아내듯 신경질을 부렸던 모습들. 그의 엄마는 엄마가 원망스러워 보였다.  


그의 외할머니는 전쟁 이후에 정신이 온전치 않으셔서 비범해 보였다. 마냥 수줍은 웃음.  아무것도 모르는 웃음. 하지만 딸이 괴로워하니 눈치를 보는 듯한 웃음. 외할머니의 정신은 아이 수준이었지만, 그 순간의 표정은 어른으로 되돌아온 듯한 미안한 웃음을 지은 듯 보였다.   


그의 엄마는 그렇게 자란 자신이 싫어서,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일절 하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두고 금전적으로 여유롭진 않지만, 마음만은 여유롭게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어제 아침 K는 엄마와 식탁 앞에서 외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삶이란 건 말이야. 매사 잘 되길  기도하기보다, 기쁨과 슬픔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 엄마는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데?" 아들은 물었다.  


"기쁨 앞에서 마냥 기뻐하지 않고, 슬픔 앞에서도 그것이 영원하다는 듯 우울해지지 않는 거야."    


"엄마. 그러면 기쁨 앞에서 기뻐하지 못하고, 슬픔 앞에서 울지 않으면 한 가지 표정만 지어야 하는 거야?" 

 

"한 가지라니?"  


"그냥 뚱한 표정. 내가 일어나서 식탁 앞에 밥을 기다릴 때 표정 말이야."  


"그래. 맞아. 어른이란 얼굴이 굳어가는 과정인 것 같구나."  


엄마는 아들 K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아서 쉬어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