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파리의 심리학 카페> - 모드 르안 지음|김미정 옮김 본문

책 사유/인문학

<파리의 심리학 카페> - 모드 르안 지음|김미정 옮김

온화수 2016. 2. 11. 09:32

좋다. 좋다.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알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사회 생활을 하다 48세에 심리학 공부를 시작해 그 후로 심리학 카페를 열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심리학 카페에서 지난 18년간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았다고 했다. 사람도 어림잡아 5만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겹치고 많이 고민하는 내용들을 이 책에 추린 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파리에서의 고민이 한국에서의 고민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진로, 사랑, 공부, 회사의 상사, 친구들과의 관계, 결혼 등등 다양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뤘다.


나는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책을 읽거나 방송을 보거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깨달았던 내용들이, 이 책 안에 대부분 이해하기 쉽게 정리돼 있었다. 배가 아팠다. 이 한 권에 다 들어있다니.


그래서 나는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 가치관과 매우 비슷해서, 공감하는 내용이 너무나도 많아서, 밤 새서 읽은 책.




밑줄

 열정적인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 당신에게


  엘로디도 그랬습니다. 3년 전 장 루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엘로디는 그에 대한 사랑이 지금도 여전한 건지 헷갈린다며 심리학 카페를 찾았습니다.

  "장 루이를 만났을 때 정말 눈이 머는 것 같았어요. 웃기겠지만, 진짜 왕자님이 나타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친구들은 내가 너무 과장한다고 했지만 저는 그 애들이 질투하는 거라고 여길 정도였어요.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고 어느새 3년이 지났어요. 물론 아직도 그를 사랑하지만 자꾸 그의 사소한 결점들을 발견하게 돼요. 장 루이는 자기 방식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못 견뎌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점점 더 날카로워져서 그를 비난하게 되고요. 한번은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가 왜 짜증을 부리는지 이해가 안 돼.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걸.' 그의 말이 맞아요. 그에게 반했을 땐 그런 모습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을 뿐이었죠. 그에게 화를 낼 때마다 제 사랑이 식어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두렵고 괜히 미안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보이지 않았던 그의 단점들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사랑의 온도가 낮아질수록 모든 걸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은 점점 줄어들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누리고 싶은 욕구가 커집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사랑의 끝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이는 사랑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즉 사랑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그냥 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지요. 다만 열정적인 사랑만이 진실한 사랑이라고 믿는 우리의 편견이 사랑의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사랑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단계에서 사랑을 '하는' 단계를 지나 사랑에 '머무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세계로부터 분리된 채 마치 하나가 된 듯한 황홀한 순간을 온몸으로 즐깁니다. 그러다 사랑을 '하는' 단계에 이르면 두 연인이 서로 에너지를 맞추어 가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머무는' 단계에서는 두 사람이 편안하고 안전한 관계 속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즉 둘만의 열정적인 사랑에서 세상과 연결된 차분한 사랑으로 탈바꿈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뜨거움이 줄 수 없었던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흐르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를 상상하는 대로가 아니라 실제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고자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대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 주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랑은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화됩니다. 그는 자신의 결핍과 부족한 부분을 마주하는 일을 전만큼 힘들어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의존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면서 상대를 받아들이고, 서로 맞추어 나가며,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해 줄 때에만 우리는 사랑에 질식당하지 않고 그 사랑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우선 화가 났을 때 그것을 타인을 향해 무작정 내던지지 말고 내 안에서 건강하게 분출해야 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입니다. 서운한 마음이 가득 차 있거나 분노가 끓고 있다면 얼른 종이를 꺼내 그 감정을 글로 풀어보세요. 남이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접어 두고 솔직하게 거침없이 적는 게 좋습니다. 그러고 나면 터질 것만 같던 화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억압되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질 것입니다. 그 감정을 천천히 느껴보세요. 이때 고통스러운 느낌을 믿을 만한 타인과 공유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화가 나는 상황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일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도, 화낼 만한 일도 아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그러고 나서 상대에게 당당하게 화를 표현하세요. 나를 화나게 한 말이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어 부당한 일을 항의하고, 과도한 요구는 당당히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와의 관계를 크게 해치지 않고, 나도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 내 감정을 온당하게 표출할 수 있습니다.




  정신 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남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을 '인정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정욕망이야말로 인간이 갖는 욕망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칭찬이나 인정을 구하는 경우는 물론, 그 이외에 우리가 품는 욕망까지도 모두 인정욕망이라는 것이지요.


  라캉에 따르면 모든 아기는 엄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갖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곁에는 언제나 아빠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기는 엄마가 사랑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엄마가 원하는 그 무엇이 되고 싶어합니다. 즉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엄마가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좋아하면 우유를 잘 먹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엄마가 바라는 것은 곧 내가 바라는 것이니, 엄마의 욕망은 쉽게 내 욕망이 됩니다.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면 좋아할 거야'가 '나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로, '엄마는 돈을 좋아해'가 '나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로 슬쩍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엄마의 인정을 구하는 이런 욕망은 사회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으로 확장됩니다. 사회가 욕망하는 돈, 성공, 명예, 존경 등을 마치 내가 원래부터 욕망했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즉 인정욕망이 타자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라캉은 무의식에 숨은 깊은 욕망까지도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닌 타자로부터 온다고 하여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최면 상태에서 강한 암시를 걸면 최면에 걸렸던 사람은 깨고 난 후에 암시대로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최면에서 깨어나면 라디오를 켭니다."라고 암시를 주면, 그 사람은 최면에서 깨어나자마자 라디오를 켭니다. 이때 왜 라디오를 켰느냐고 물어보면 "음악이 듣고 싶어서요.", "좀 답답해서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라디오를 켠 이유는 암시 때문입니다. 그가 말한 이유들은 모두 행동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지요. 라캉이 말하는 인정욕망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가 무언가 원할 때 그것을 당연히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타인들과 세상이 바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람들의 기대와 인정에 부응하기 위해 애쓴 삶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내게 중요한 것은 도대체 뭘까?' 안타깝게도 그 대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일에도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순간에 느껴지는 솔직한 감정을 들여다보고, 내향성과 외향성 같은 기본적인 성향에 대해 알아 가야합니다. 이런 훈련이 쌓이다 보면 자기 성격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게 되고,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신념을 발견하게 되지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삶의 기본 원칙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원칙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척추가 우리 몸을 지탱해 주고 있듯이, 단단한 원칙이 그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물질적인 성공보다 내적인 평화가 더 소중한 데보라는 주말에는 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회사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주말의 평화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평등, 존중, 관용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프랑수아즈는 이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 대상이 부모나 형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사람들은 당신을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잃는 것은 마치 내 존재 가치를 잃는 것처럼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을 했을 때에만 주어지는 칭찬은 진정한 칭찬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통제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칭찬은 당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더 눈부시게 앞으로 나아가게끔 북돋아 주는 응원입니다. 진정한 칭찬은 편안한 동물원에 가두기 위해 주는 작은 보상이 아니라, 넓고 푸른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도록 하는 격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매달리지 마세요.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세요. 자꾸만 흔들린다고요? 그럴 땐 내가 나를 칭찬해 주면 됩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기쁨이니까요.




  폴린은 무슨 일이든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면 무관심하고 자신을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았던 어머니에게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또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지나치게 관심과 애정을 요구하는 버릇이 있었지요. 내가 그녀의 이런 점을 지적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그럴 거에요. 하지만 나는 그럴 권리가 있어요. 애정을 거의 못 받고 자랐거든요."


  폴린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이유로 현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라캉은 환자들의 이런 경향을 '증상 키우기'라고 불렀는데,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상처를 근거로 더 많은 걸 요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폴린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겪은 결핍 뒤에 숨어 계속 그 영향을 받도록 자신을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요. 만약 이 길을 선택하면 그녀는 만나는 이들에게 과도한 사랑을 요구할 것입니다. "날 사랑하고 보살펴 줘요. 우리 부모님이 내게 주지 않은 사랑으로 내 결핍을 채워 주세요." 하지만 폴린과 만나는 사람은 자기와 상관도 없으며 자기가 알지도 못했던 결핍의 틈을 멩느라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결국 폴린은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갈증으로 심신이 피폐해질 게 분명합니다.


  폴린의 또 다른 선택은 과거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결핍을 이해하고,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어린 시절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상적인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거두고, 과거로부터 한 걸을 떨어져 보겠다고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책장을 덮을 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었다고 해서 그것을 잊어버리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책이 내 마음에 들었는지, 인상적이었는지, 감동적이었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읽은 책을 한구석에 묻어놓은 채 다른 책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즉 어린 시절의 상처를 한쪽에 넣어 둔 채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가능성에 집중하면서 즐거운 일상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심리 상담가라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줄 거라고 믿으며 나를 찾아옵니다. '이 사람은 그래도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하는 환상을 가지는 거지요. 하지만 상담을 해 나가다 보면 결국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픈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어느 뛰어난 의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의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진정한 치유는 시작됩니다. 결국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까요.




  투자자들은 늘 "달걀을 한 바구니에 넣지 말라."라는 격언을 염두에 둔다고 합니다. 하나의 주식에 모든 돈을 투자하면 모두 잃을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경계하라는 뜻이지요.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친구, 직업, 여가, 종교 등 우리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다양한 투자처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 일에 가장 관심을 쏟거나 육아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등 중요한 투자처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평생 한 가지 일에만 '올인'하면 인생의 다른 요소에 구멍이 생길 위험이 높을뿐더러, 그 한 가지를 잃게 되었을 때 상상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조르주의 인생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과도했던 겁니다. 그나마 어머니를 돌보는 데 쓰는 시간을 제외하면, 가족과 함께하거나 스포츠를 즐기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여타의 여가 생활을 위해 그가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조르주 역시 이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일 때문에 가족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비난할 때면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습니다. 가족들을 위한 자신의 노고를 아내가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가 일에 '올인'하는 것이 직원들 사이의 실적 경쟁을 부추기는 회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회사와 상사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습니다. 그의 상사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소한 업무도 직접 관리했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좋은 성과를 창출했고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했지요. 조르주는 그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부러웠고, 그에게 한 번이라도 칭찬을 받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한 결과 조르주는 2년 전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이끌었고 회사에서 주목 받는 직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에 대한 부담감은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회사의 기대가 커진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조르주는 점차 성공에 집착하게 되었고, 작은 비판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자연히 동료들과도 사이가 점점 멀어졌고요.


  조르주는 인생의 여러 요소들 사이에서 균형을 되찾아야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만약 이 위기를 그냥 지나친다면 가족, 친구, 동료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게 될 터였습니다. 또 만약 회사에서 자리가 위태로워지거나 해고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의 인생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게 분명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타인이 아닌 자신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착하다고 칭찬하면서 은근히 그의 뜻을 무시하고 계속 자기 의도대로 하며, 점점 그것을 고마워하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당연히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여깁니다. 또한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감과 삶의 의욕을 점차 상실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타인과 진정한 접촉을 원한다면 물렁물렁한 반죽 덩어리가 아닌 확실하고 단단한 자아를 가져야 합니다. 




가스통은 10년이나 근무한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만든 건 6년 동안 함께 일한 절친한 동료 톰이 그를 위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가스통은 심리학 카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은 이렇게 말했어요. '네 입장을 충분히 알겠어. 진짜 힘들 거야!' 내 입장에 대해 그가 뭘 알 수 있겠어요? 우선 저는 살 집도 없는 상황이에요. 그는 해고를 몰라요. 한 번도 해고당한 적이 없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가 내 입장이 된다는 거죠? 제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요."


  "그럼 어떤 말을 듣고 싶었나요?"


  "그냥 '널 이해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말해줘. 나한테 기대도 돼.' 이런 말을 들었다면 좋았겠죠."


  동정이 상대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것이라면, 공감은 상대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 후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마주 보고 있는 편이 좋듯이, 타인을 돕고 싶다면 그와 나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고유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울타리와 힘들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꼭 그의 입장이 되어 봐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의 마음을 함부로 읽으려고 하지 마라


  눈치를 보다 보면 '혹시 그런 게 아닐까?' 하던 추측이 '저 사람은 그런 게 틀림 없어!' 하는 억측으로 바뀝니다. 독심술을 하듯 상대의 마음을 꿰뚫었다고 확신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내가 읽은 상대방의 마음은 곧 나의 마음일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그 상황에서 가졌던 마음을 상대에게 투사시켜 마치 상대방이 그런 마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투사란 스스로 수용할 수 없는 욕망, 생각, 느낌을 다른 사람에 옮겨 놓는 방어 기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정숙을 의심하는 남편은 사실 '바람피우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아내에게 투사하는 중입니다. 자신은 선하고 정당하고 우월하다는 믿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면의 부정적인 생각, 욕구를 외면하는 것이지요. 투사는 우리의 의식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감정들을 처리해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애꿏은 사람을 의심하게 미워하게 만듭니다.


  베어 하트라는 인디언 주술사는 처음에는 잔잔한 물에, 다음에는 막대기로 연못을 휘저은 뒤에 얼굴을 비춰 보게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네 속에는 네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볼 때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네가 싫어하는 것이 실은 네 자신의 일부이다. 늘 이것을 명심하여라." 우리가 함부로 남의 마음을 읽고 그의 생각을 단정지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밖에 알 수 없는 동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 느낌, 경험에 대해 추측할 수 있을 뿐 결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빗대어 '나 같으면 이럴 거야'라는 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어림짐작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닻 내린 후 조정하기'라고 부릅니다. 일단 내 주관적인 경험에 닻을 내린 후 이를 조금씩 수정해서 타인을 알아 맞히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조정 과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투사하지 않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십니다. 비록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더라도 끊임없이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혹시 오랫동안 남의 눈치를 보아 왔다지만 실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제는 '눈치 보기'가 아닌 '눈치 재기'를 해 보면 어떨까요? 우선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순간 일어나는 나의 감정적 반응을 살펴보세요. 내 마음 상태를 눈치 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편견 없이 상대를 바라보세요. 엄마가 아기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 채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듯, 상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 그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눈치 채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의 마음을 투사하지 않고 타인을 그 자체로 바라보려고 노력할 때에야 우리는 눈치를 건강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직감적으로 느낀 것들의 이면에는 대개 나의 불안, 두려움, 시기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의 속마음이라고 믿으면서 쓸데없이 눈치를 보고 에너지를 쏟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눈치 보는 행동은 괜히 상대를 긴장시키고 분위기만 어색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니 자꾸 남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방에게는 상대방의 생각이 있습니다. 함부로 그 자리를 침범하지 마세요. 그것만으로도 복잡했던 관계의 문제는 한결 단순해집니다. "남에게 보이는 관심을 반만 줄여도 생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을 기억하세요.




나르시시스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경계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타인은 오로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함부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합니다. 상대방을 한바탕 약 올리고 나서 장난이었다고 말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당연히 친구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의 일에 함부로 왈가왈부하고,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제멋대로 물건을 가져다 쓰고, 상대를 원하는 때에 무조건 독점하려 하는 등 경계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부리는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경계를 지켜 달라고 단호하게 말하면 해결될 거라 생각하겠지만, 이는 오히려 그들의 방어 본능만 자극할 뿐입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그러한 태도를 자신의 특별함, 위대한, 자격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더 화를 내거나 상대방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등 강하게 맞대응합니다. 만약 그들과 관계가 단절되어도 좋다고 여긴다면 상관없겠지만,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최대한 온화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일단 경계를 정했다면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들의 맞대응에 약해져 경계를 풀면 그들에게 내 뜻이 진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일러 주는 셈입니다. 상대와 주고받는 행동에 대해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이렇게 스스로 내 공간을 확실히 지켜 나갈 때에만 그곳에서 온전한 나의 삶과 행복을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내면의 공허감을 100퍼센트 채워 줄 수 없습니다. 내면의 공허감은 자기 삶이 중요하고 독특하다는 확신을 얻게 될 때에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외모 가꾸기는 우리의 자신감을 크게 향상시켜 줄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가치와 외양적인 아름다움을 분리시킬 때에만 가능합니다. 세계 최고의 석학 아인슈타인은 어설픈 외모를 언급하여 자신에게 조롱 아닌 조롱을 보내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용물보다 그것을 싼 포장지가 더 좋다면 그거야말로 슬픈 상황이 아니겠는가." 포장지는 내용물을 돋보이게 하고, 선물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 줍니다. 그러나 선물 없는 포장지는 무가치합니다. 포장지는 제 역할을 할 때에만 그 아름다움이 빛나는 법이니까요.


  패션 잡지 <보그>의 전 편집장은 "유행이란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멋이란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 주위를 둘러보니 외모는 무척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이야기를 나누면 지루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름답지 않아도 은근한 매력이 돋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단단하게 다져 오며 자기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쉽게 살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자기만의 향기이자 멋이 됩니다. 오래가는 멋은 결코 외양적인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지 않는 법입니다.




  셋째는 수많은 선택의 기회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뭐든지 선택해야 하는 현대 사회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기준이 뚜렷한 사람은 선택이 괴롭지만은 않습니다. 반면 자기 기준이 불분명할수록 끊임없이 가능성들을 계산할 뿐 선택은 못합니다. 자기 기준이 없으니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계속 생겨나고,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점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선택이 어려울 땐 선택의 목표를 분명히 하라


  "한 번쯤 삶에 대해 심각하고도 엄숙한 태도로 시간을 내어 찬찬히 생각해 본다면 틀림없이 당신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당신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독일의 리더십 전문가 라인하르트 슈프렝어의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모두 우리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잘못된 선택뿐만 아니라 선택을 미루는 것 또한 자신이 선택이란 뜻이지요. 그리고 자꾸만 선택을 미루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장의 기회를 우리 스스로 날려 버리게 됩니다.


  결정도 연습입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실패하면서 조금씩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아 갑니다. 그러니 선택의 결과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답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해 보세요. 그 누구도 나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정을 내려 주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삶의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자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후회 없는 완벽한 선택을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세요. 사람들은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최고의 선택을 해야한다는 함정에 빠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포기해야 하는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그것을 큰 기회비용으로 느끼기 때문에, 온갖 비교 끝에 결정한 단 하나의 선택이 기회비용을 상쇄할 만큼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요. 우리는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스러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선택이란 완벽한 선택이 아닌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내리는 결정입니다. 선택에는 늘 목적이 있습니다. 배우자를 고르는 목적은 그와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고, 약속 장소를 고르는 목적은 친구와 즐겁게 만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무결점의 선택을 하겠다고 나서면 선택 자체에 매몰되어 목적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끝없이 이성의 조건을 따지거나 약속 장소를 고르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친구와의 만남 자체가 부담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 자체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이 정도면 됐다'는 기준을 가지고 적당한 선에서 고민을 멈추고, 그 결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선택은 선택의 순간뿐 아니라 선택 후의 과정에 따라 그 만족도가 달라짐을 잊지 마세요.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희망을 찾아야 할 때만 희망을 발견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코를 후비는 사람과는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증조할아버지라면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운명을 피할 수 없을 때, 도망칠 수 없을 때, 그리고 취소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그때마다 '다른 것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에 휩싸인다면 그것만큼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정하고 난 다음에는 뒤돌아보지 마세요. 어차피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렇게 내 선택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때에만 우리는 결정에 대한 장점을 훨씬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그 동기가 어디서 비롯되느냐에 따라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적 동기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흥미, 호기심, 도전 의식, 자기 만족감 등에서 비롯되는데, 쉽게 말해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들이 내적 동기에 의한 활동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훨씬 높고, 수행자가 자발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어려운 과제에도 두려움 없이 도전합니다. 


  반면 외적 동기는 과제의 해결에 따른 보상이나 처벌에서 비롯되는데, 이를테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거나 학사 경고를 면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외적 동기에 의한 활동은 보상이나 처벌이 사라지면 그 행동의 동기 또한 사라지므로 지속력이 약하고,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수행자가 비교적 소극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마리잔은 아들을 기쁘게 하려고 살을 뺐습니다. 내적 동기보다는 외적 동기가 강했던 것이지요. 먹고 싶은 것 참고 하기 싫은 운동을 하는 다이어트의 고통을 견디는 데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르잔은 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러한 고통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체중 감량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에서 다이어트를 끝냈던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거나 처벌이 두려울 때 사람들은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유지시키려면 더 좋은 보상, 더 강력한 처벌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잔소리로 사람을 바꿀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처음에는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그 일을 할지 모르지만 그 일을 계속하게 하려면 더 심한 잔소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극이 심하면 면역이 되기 마련이어서 웬만한 잔소리에는 반응하지 않는 단계에 이릅니다. 겉으로는 "네, 네" 대답하지만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 아이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뭔가를 잘하면 칭찬해 주고, 잘못하면 처벌을 내립니다. 그리고 경쟁을 붙여서 더 잘하게 만들려고 하고, 잘하게 되면 장난감이나 게임기를 사 주며 더 노력하라고 독촉합니다. 이렇게 보상과 처벌에 익숙해지면서 아이들은 내면의 빛나는 호기심 대신 타인과 사회의 요구를 우선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이득이나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공부나 업무 자체에 흥미를 잃고, 무얼 해도 무기력한 어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스스로 결정하고, 흥미를 가지고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에 의해 움직일 때, 즉 외적 동기보다 내적 동기에 따를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하든 즐기면서 오래 하는 힘이 생깁니다.


  몇 년 전 구두 수선소를 찾았을 때 30년 동안 구두를 고쳐 온 할아버지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어디가 문제인지 단순하게 묻는 보통의 수선공과 다르게 그는 구두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발뒤꿈치가 아프지 않은지, 오래 신으면 발이 꽉 끼이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찾은 구두는 전보다 훨씬 편하고 깨끗해 보였습니다. 문제인 부분 외에도 여러 군데를 수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단순히 구두 고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리 시민의 발 건강을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힘들어도 즐겁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내적 동기에 따라 행동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찾아보세요. 자신의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점점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은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수록 실제 그 일을 하면서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기력은 달콤한 유혹입니다. 포기해 버리면 좌절을 겪을 일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까지 내 인생을 되는 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는 것, 인생의 만족도는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패하면 어떡하지?', '어차피 안 될텐데' 하는 무력감이 고개를 들 때 냉정히 현실을 직시하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것들을 찾아보세요.




  한번은 내 어머니가 여성들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데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에 참가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시더니 한동안 돌아오지 않으셨다. 다시 돌아오셨을 때에는 창백한 모습이어서 나는 "어머니,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그래 괜찮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아주 힘든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라고 대답하셨다.


  "그게 뭔데요?"


  "지난 40여 년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을 네 아버지가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났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정작 무엇인지 네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욕구를 슬쩍 암시하기도 하고 여러 방법으로 돌려서 표현할 뿐 자신의 의사를 솔직하게 직접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 욕구를 무시하거나 들엊지 않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댑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그 에너지를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마거릿 : 수요일마다 클로에는 뭘 해요?


사만다 : 10시엔 승마 연습이 있어서 내가 데려다 줘요. 그러고 나서 두 시간 동안 영어 스피킹 과외를 받고요. 오후 4시에는 댄스 강습이 있어요. 그게 끝나고 6시 반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학교 숙제를 하고요.

 

마거릿 : 테오는 글쎄, 아무것도 안 하겠다지 뭐예요. 그래서 내가 대신 축구랑 피아노를 등록시켰어요. 난 테오가 하루 종일 빈둥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테오도 영어를 시켜야겠는데요.


  그들은 자신이 부모로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아이들이 한시도 쉴 틈을 갖지 못하고 계속 무언가를 하게끔 강요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다른 아이들보다 내 아이를 더 바쁜 사람으로는 만들 수 있겠지만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기가 진짜 원하는 일,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아내고 자기 힘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을 배웁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시간을 부모가 대신 채워 넣고 간섭하게 되면, 아이는 수동적이고 자기 삶을 살아 내는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삶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나의 권한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것으로 채우지 못한다면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진짜 내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어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질문을 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 이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지워 버려야 할 권태와 불안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찬찬히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기쁨과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만끽해 보세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 시간을 긍정적으로 활용해 보세요. 나중에 당신은 깨달을 겁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진정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