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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해지기 위해 알아야 할 뇌 이야기, <뇌는 탄력적이다> - 닐스 비르바우머·외르크 치틀라우 본문

책 사유/과학

똑똑해지기 위해 알아야 할 뇌 이야기, <뇌는 탄력적이다> - 닐스 비르바우머·외르크 치틀라우

온화수 2016. 2. 17. 10:23

과학에 문외한이라 읽기 버거운 부분이 있었다. 어려웠다. 하지만 책에 관심이 많고, 두뇌나 교육에 관해 호기심이 많아서 흥미롭기도 했다.


나는 두뇌를 발전시키고 깨닫는 걸 좋아한다. 똑똑해지기 위해 알아야 할 뇌과학이라길래,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대식 교수의 추천사가 띠지에 있길래.


TV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적이 있는데, 인상 깊었다. 뭔가 형이상학적인 철학에 한창 매료돼 있었을 때, 그가 과학적 기술을 바탕으로 인문학을 설명하는 게 흥미로웠다. 형이상학적이라 생각했던 철학은 현대의 과학적 기술과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서 고전이 위대하다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나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가?"라는 의문. 원하는 것 같기도,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니까.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하다 보면,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로워지면 소속을 갈망하니까.


어른이 되어 내 길을 스스로 개척하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수없이 있었던 군대를 왜 그리워하게 되는 걸까. 군대에서는 누군가가 시키는 일만 하면 밥도 주고 선택에 대한 고민 없이 같은 옷, 같은 행동 안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자유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상 대중은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적당한 억압을 원한다.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많은 선택권을 자신 혼자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선 차라리 선택권이 좁은 게 행복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주관을 길러 전인(前人)이 되는 교육 제도가 아니며, 예속되게 만드는 교육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유보다는 억압에 익숙하다. 한국인에게 자유는 오히려 불안이다.  


어려운 부분은 흘려 읽었고, 마음 가는 부분은 집중해서 몇 번을 읽었다. 그래서 전체 내용을 요약하기엔 느낀 게 빈약하고, 부수적인 이야기들로 글을 채운다.





밑줄

한편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사람 가운데 겨우 50퍼센트만 자폐증 환자다. 나머지 절반은 인격과 개성을 흠잡을 데 없이 지니고 있다. 이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재능 때문에 특이한 행동을 한다. 물론 그 밖에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약간은 서번트증후군 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우리가 킴 픽처럼 무엇이든 쉽게 외워버리며, 계산도 마치 전자계산기처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리고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동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서번트증후군 환자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운명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황당무계하게 들리겠지만, 어쨌든 뇌는 적어도 누구에게나 평범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승려이자 선의 고수인 다쿠안 소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거기에 단 하나 달려 있는 빨간 잎을 관찰하면, 다른 나뭇잎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두 눈이 잎을 응시하지 않은 채, 아무 의미를 두지 않고 나무를 관찰하면, 무수히 많은 나뭇잎이 보인다. 하지만 단 한 개의 나뭇잎만 두 눈에 포착된다면, 나머지 나뭇잎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듯 고착되지 않고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전반적으로 서번트증후군 환자의 광범위하게 열린 인식의 창을 떠올리게 한다.




뉴로피드백으로 주의력을 높이는 방식의 원칙은 트레이닝을 하는 본인이 자기 뇌를 직접 관찰한다는 점이다. 훈련 당사자는 뇌파 측정 전극을 비롯한 뇌 활동 측정 기구 아래에서 컴퓨터에 나타나는 신호를 분석하고 모니터에 떠오르는 그래픽을 해석해야 한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훈련은 예상외로 간단하다. 컴퓨터 화면에 빨간색이 반짝거리면, 트레이닝 당사자는 이 빨간색을 녹색으로 바꾸는 과제를 수행한다.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한다. 가령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거나, 최근에 있었던 뜨거운 사랑의 밤을 떠올리거나, 가벼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떨어진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0.05초 지속되는 전의식의 시간 안에서 인식을 관할하는 뇌 영역을 활성화시켜야만 색이 바뀐다는 점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우연히 색깔을 바꾸는 데 성공하며, 이후 그는 자신의 뇌를 예전에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조작'하면서 다시 성공하려 애를 쓴다. 일반적으로 한 시간짜리 뉴로피드백 트레이닝을 두 차례 정도 받으면 해당 뇌 영역을 의도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다.




뉴로피드백이 치료 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둠에도 불구하고, 나는 뉴로피드백이 기적을 실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즉 뉴로피드백 트레이닝을 거쳤다고 해서 여태껏 특정 분야에서 재능도 없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피아노를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는데 단지 악기 연주를 관할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었다고 돌연 피아노 연주의 대가가 되는 일은 결코 없다. 뇌영역의 버튼만 눌러서 천재로 돌변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재능과 관련된 연구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아울러 존 레넌과 마이클 잭슨 같은 위대한 음악가는 대략 스무 살이 될 때까지 1만 시간 이상 연습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재는 오로지 수많은 시간을 끊임없이 훈련해 기량이 원숙해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천재라도 어렸을 때부터 트레이닝에 집중해야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재가 지닌 '서번트 잠재력'을 일깨우고, 재능을 탄탄하게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기타 연주를 비교적 잘한다면, 전의식 트레이닝을 통해 기량을 강화할 수 있다. 이 트레이닝에서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연주한다는 생각 대신, 멜로디가 손가락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트레이닝은 특히 즉흥연주를 자주 하는 재즈나 블루스 같은 장르에서 커다란 장점을 발휘한다. 물론 단점도 있다. 서번트로 들어서는 창을 열면 자신만의 터널 안으로 가라앉으며 주변 세상과 완전히 괴리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대중이나 음악 동료와의 의사소통이 단절될 뿐만 아니라 '음악적 자폐증'에 몰두하는 돌연변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오케스트라와의 콘서트나 밴드 공연에 큰 결점으로 작용한다.




'하등 생물은 더 이상 목표한 효과를 얻을 수 없을 때 활동을 중지한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 경우 하등 생물에게 어떤 센 자극을 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꺼진 것이다. 비록 생리학적으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음에도 말이다. 신경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뇌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얻을 것이 더 이상 없다면 에너지 자원을 낭비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은 진화의 관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투자를 했으면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법칙은 자연에서도 통용된다. 그리고 더 이상 이익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투자를 포기하고 힘을 아끼는 것이 낫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감금증후군 환자에게서도 발견했다. 우리는 비활동 상태에 있는 환자들을 깨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다양한 '설득의 기술'과 책략을 활용해야 했다. 그렇다고 감금증후군 환자들이 불행을 느꼈을까?

우리는 감금증후군 환자의 뇌 활동이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그들이 절망과 비참함을 느낀다는 암시도 발견하지 못했다. 환자는 정지 상태에 놓이면서 과거에는 전형적인 중독자였으며 매사에 열렬한 의지를 품은 사람이었다는 단서를 내보이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행동에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항상 부정적인 것만 기대하는 바람에 고통에 시달린 우울증 환자의 뇌라는 것을 상기할 만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바로 감금증후군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기대하는 마음도 잃었기에 고통 역시 못 느낀다.

우리가 감금증후군 환자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들은 평균적인 건강한 사람들보다 훨씬 만족스럽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순간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의 판정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완전히 고립 상태에 있는 환자의 메시지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상당수 감금증후군 환자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은 의지가 없는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쇼펜하우어와 불교 교리가 삶의 번민과 고뇌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일컬은 상태이기도 하다. 즉 불안한 느낌에서 자유로우며, 정지되었다는 느낌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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