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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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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온화수 2016. 2. 27. 11:54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 보셨나요. 전 부끄럽게도 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윤동주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전까지는 그의 시를 문제집에 나올 법한 시다, 하지만 오래된 시 중에선 꽤 감성적이다, 괜찮다, 정도로 느끼고 있었어요.


영화에서 시를 읊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스토리 상에서 자연스레 나누는 대화도 시에서 인용된 게 많네요. 시집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그는 1943년 고향으로 돌아오기 직전 독립운동 혐의로 붙잡혀 2년 형을 선고 받았어요. 후쿠오카 감옥에서 갇혀 있던 중에 죽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은 그가 죽은 뒤인 194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공부라고 하면 시험의 개념이 강한 것 같아요. 시험의 개념말고 뭔가를 알고 깨달아서 현실에 적용해보는 것, 자신의 모자람과 욕망을 느끼고 부끄러워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사람이 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정식으로 등단하지도, 시집을 출간하지도 못한 채 하늘로 피어올랐어요. 윤동주 시인처럼 시는 삶으로 보여지는 게 아닐까요.


삶은 증명하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에요. 직접 뿌린 짙은 향수가 아니라, 사람 내면의 향기로 은은하게 드러나는 것이에요. 시인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밑줄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 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

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

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