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내가 공부하는 이유> - 사이토 다카시 지음|오근영 옮김 본문

책 사유/인문학

<내가 공부하는 이유> - 사이토 다카시 지음|오근영 옮김

온화수 2016. 3. 2. 21:36

공부 좋아해서 하시는 분 거의 없으시죠? 근데 속상하게도 이 책을 쓴 분은 공부를 좋아해서 하시는 분이에요.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는 시험이나 자격증을 위한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공부예요.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재미! 이게 공부라면 저도 공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시험이 있는 공부는 잘 안 하게 되어요. ㅠㅠ


요즘 경제 상황도 어렵고, 모든 관계가 돈이 결부되니, 알게 모르게 공허하잖아요. 그래서 매번 사람들 불러내기도 미안하고, 만나면 우울한 얘기를 알게 모르게 하게 되고. 만날 땐 좋은데 돌아오면 가슴과 등이 뻥 뚫린 것 같고.


백세 인생이라는데, 젊어서도 이토록 외로운데 어휴ㅠㅠ...


얼마 전에 진보적이라는 신문 오피니언마저도 40대 중반 칼럼리스트께서 카페에 혼자 오는 젊은 남자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썼더라고요. 카페는 토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유래인데, 더구나 남자 혼자 온다는 게 이상하다고요.


요즘 카페에 공부하거나 책 읽거나 혼자 많이들 가지 않나요? 나이 드신 분들로 느껴지는 댓글들을 보니 참 생각이 다르구나,를 느꼈어요. 사람들이랑 왁자지껄 으쌰으쌰 해야지, 불쌍하게 뭐하는 거냐, 라는 투였어요.


반면에 젊은 층으로 느껴지는 댓글들은 우르르 몰려서 자기 혼자 있는 시간을 못 버티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으르렁 거리고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부장이 퇴근 바로 전에 일주고 야근시켜 집에 들어가기 싫으니 술 사준다며 억지로 회식한다고.


모르겠어요. 어떤 게 맞는 건지. 적절한 게 좋은 건데. 


이제는 사회 분위기가 혼자 있는 시간을 버텨야 하는 때가 온 것 같아요. 개개인의 삶이 중요해지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회사보다 각자의 일상을 더 중요시해요. 


어떤 방식으로든 외로움을 견디며 만족감을 주는 게 공부라고 생각해요.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공부 말고, 과정 자체가 즐거운 공부. 명리학 책에서 그런 글을 봤어요. 법조계 있는 분들은 나이 들어서 명리학 공부하시는 분들이 꽤 있다고. 이런 것도 과정이 즐거운 공부겠죠. 


공부라고 해서 열심히 듣고 필기하는 게, 편안한 자신만의 방법이나 마음 가는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아요. 하버드 학생들의 검증된 공부 방법이니, 서울대 추천 도서 목록이니, 맘에도 안 가는 걸 시험 준비하듯 보시지 말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만화책이든 동화책이든 무엇이든 자신이 마음 가는 책을 읽어보세요. 거기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밑줄

누구나 하는 방식, 내가 평소 사용하는 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이 결국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몇 년 일해 보니까 일이라는 게 다 비슷비슷하던데? 프로젝트는 매번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거야"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한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번 새로운 종류의 과제가 있다. 그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궁리하는 동안 이전의 경험에서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매 학기마다 독서 세미나를 진행한다. 내가 독서 목록과 수업 계획표를 바꾸지 않으면 내 수업은 매번 똑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서 목록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수업에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매 학기마다 완전히 다르다. 유난히 학생들이 소극적이라 진행이 매끄럽지 않은 경우도 있고, 몇몇 학생들이 너무 나서서 주도를 하는 바람에 세미나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도 있다. 예상치 못한 질문으로 인해 세미나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주제를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수업에 따라 소극적인 학생들을 위한 교수법을 좀 더 연구해야 할 때도 있고, 순발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수업을 하고 있어도, 내가 일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세상에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없다. 만약 반복된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형화된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불어넣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배울 것은 반드시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렸다.





'인생의 호흡을 얕게 하는 공부'는 일정 목표를 달성하면 끝이 나는, 호흡이 짧은 공부다. 토익 900점 넘기기,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 따기 등이 그런 공부에 해당한다. 통상적으로 회사에서 요구하는 '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에 취업할 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취직한 이후에도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자기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일시적인 만족감과 가시적인 성과는 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생각의 힘을 키워 주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나만의 안목을 갖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깊은 호흡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뛰어든 많은 젊은이들이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도, 일상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허무도 사라져야 하는데,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게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닌지 초조함은 더욱 커진다. 숨이 가쁠 때일수록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깊은 호흡을 해야 하는데, 더 짧은 호흡을 하니 계속해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이치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 해 왔던 공부와는 다른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를 해야 한다.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란 문학, 철학, 사학, 물리학, 수학, 음악, 미술 등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학문을 업으로 삼는 연구자나 교수 같은 사람들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공부를 하라는 게 아니다. 공부의 수준과 목표는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되고, 단지 교양을 쌓는 정도의 공부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 공부들은 우리의 지식 체계를 풍요롭게 해 주고 생각하는 법을 길러 주며 더 나아가서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까지 고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는 아직도 배울 게 많다'라는 자세를 갖기란 쉽지 않다.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과 보고 들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쯤은 나도 알고 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라는 식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만나면 일방적인 대화만 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지루하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 한마디로 배우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반짝임이 없다.




또한 공부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활동이다.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할 쯤이면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줄어든다. 설령 여유가 있다고 해도 물질적인 소비로 인한 만족감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하나를 손에 넣으면 곧바로 다른 뭔가가 갖고 싶어진다. 최종적인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공부는 문고본으로 한 권, 만 원 내외라는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다. 약간의 돈과 시간만 있다면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확실한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 심지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부는 가장 효율적인 투자임이 틀림없다.




하루 온종일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정도, 그저 '오늘은 이걸 배웠지' 정도면 된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성취감,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는 기쁨을 만끽하자.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축하하며 매일을 음미하자. 이렇게 공부가 인생의 축이 된다면 그 인생은 죽는 마지막 날까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공자의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 나는 배움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입신양명이나 부를 쌓기 위한 공부가 아닌 성장을 위한 공부 그 자체를 좋아한다.

- 나는 세상 어디에서든, 어떤 것에서든 '사람다움'의 가치를 찾아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 '사람다움'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좋은 것은 기쁨 마음으로 배우고, 나쁜 것은 경계해야 할 예로 삼는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처럼 철하자가 되어 '더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평생 고민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어떨까? 내가 해야 할 일과 이루고 싶은 목표 사이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따라가게 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처럼 잠깐씩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하루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소크라테스처럼 생각해보자.




1. 질문법 1단계 : 상대방의 주장이 어떤 내용인지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고 동의를 얻는다.


소크라테스 :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따라 정리하면, 에로스는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사랑하고 갖고 있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네. 이것이 필연이라고 생각되네만, 자네는 어떤가?


아가톤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2. 질문법 2단계 : 상대방의 주장이 가진 논리적인 틈새를 파고드는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 : 자네는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추한 것들에 대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네. 앞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네. 에로스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니까 말이야.


아가톤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로스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양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질문 하나로 인해 아가톤은 '에로스는 가장 아름답고 선하여 훌륭하다'는 자기의 주장이 모순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여,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나 스스로도 ㅁ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무지와 혼란을 토로하게 된다.


이 대화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가톤의 발언으로 '멍석을 깔아 놓은 자리'에 참여해 "자네의 논리대로라면 에롯는 이렇게 되겠지"라는 이야기를 하며 아가톤으 생각을 이끌어 줄 뿐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논리적인 필연에 따라 "이건 이렇게 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을 언진다.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의 논리에 따라 자신이 한 말을 돌이켜 보고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충분히 납득한다. 에로스는 대한 지식이 있는지 여부는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논리가 제대로 되었는지, 질문을 옳게 하고 있는지 등의 사항을 서로 확인할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었다. 즉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생각,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답을 찾든 못 찾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면서 답을 구하려는 '의지'가 더해졌을 때 거기에서부터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고 보았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게 배움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하지만 자네의 이야기하는 태도는 참으로 훌륭했네"라는 말로 의지를 복돋아 주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독려했다.




소크라테스에게 토론은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잘못된 논리로 주장을 펼칠 수 있지만 토론의 목표는 그것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함께 짚어 가며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토론은 논리를 지적한 사람이 '이겼다'라는 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토론하는 과정이 한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닌지, 누구나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논리적인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향연』에서 아가톤이 토론 말미에 "소크라테스여,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 말씀이 맞겠지요"라고 말했을 때 솤라테스는 "아니, 아가톤, 오히려 진리에 대해 반대할 수 없을 걸세. 소크라테스의 말에 반대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라고 답한다. 누가 옳고 그런지를 따지고, 나보다 지적 수준이 더 높은 사람 앞에서 항복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진리인가 아닌가의 영역에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먼저 이런 말도 안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오이디푸스가 내뱉은 말 혹은 예언자가 한 말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글귀 하나를 찾아보고, 그 글에 이어서 자신만의 대사를 써 보도록 한다. 즉, '나는 이 글을 쓴 사람이다' 혹은 '이 글 안에서 직접 말을 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나라면 여기서 어떤 말을 할까?' 하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비록 오이디푸스와 똑같은 시련을 겪을 일은 없겠지만 자기 인생에서 겪었던 가장 힘들었던 일, 슬펐던 일 등등을 떠올려 보면서 작품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다.




공부를 할 때 쓸데없이 융통성 없는 성실함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며 억지로 붙잡고 있다 책이 싫어진다면 그것이 더 문제다. 실제로 1년에 책을 300권 이상 읽는 다독가들도 자기에게 들어온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책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부분을 찾아 발췌하며 읽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속도로 훑어보면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내기도 한다. 모든 책을 집중해서 완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버리고 어떤 책이든 일부분이라도 읽으면서 좋은 부분, 나와 통하는 부분들을 찾아보라. 만약 '이거다' 싶은 부분을 만나 불꽃이 터진다면 그 불꽃을 시작으로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 나갈 수도 있다. 거기에서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내 수업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읽은 학생이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만들었다'는 결말을 여자 친구에게 이야기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친구의 반응이 굉장했단다. "거기서 눈을 멀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면서 안 해도 될 말까지 해서 결국 자기 자신한테 저주를 퍼부은 꼴이된 거잖아. 그런 성격으로는 눈이 멀어도 문제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눈을 멀게 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인데,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이 대부분 학생들의 독서법이다. 그런데 그녀는 저자의 생각이 정말 맞는 것인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의견을 말한 것이다. 단편적인 대화였지만 저자나 책의 권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에서 더 발전하면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수준까지 이르러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을 때 경허함을 갖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인을 실천할 때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 역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요한 가치를 실천하거나 진리를 탐구할 때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눈치를 보며 우대하거나 양보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렇게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가 틀릴 수 있다고는 해도 우리보다 해당 분야에 대해 더 많이 공부했고, 깊이 생각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도전하는 자세,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망설이지 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고전을 읽어 보자. 아마 그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 나는 이런 방법을 쓴다. 강연을 듣는 동안 간단하게 필기를 하면서 질문거리를 따로 적어 둔다. 그리고 중요도에 따라,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정도에 따라 1부터 3까지 번호를 매겨 둔다. 이렇게 구별을 해 놓으면 강연이 끝난 직후 중요한 질문부터 차례대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적어 둔 질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고르는데, 여기서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 질문에 흥미를 느낄까?'이다. 강연이 끝난 뒤에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게 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만 중요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를 언급하게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