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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의 <불안> - 알랭 드 보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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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의 <불안> - 알랭 드 보통

온화수 2018. 10. 28. 18:51



밑줄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다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염세주의자였던 샹포르는 그런 문제를 넌지시 드러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멍청하고 허약하고 흉물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이책 156P


나의 가치관이 분명하면, 부딪힘이 발생한다. 내가 아는 것이 이런데, 그것과 다르면 피곤해지니까. 내가 아는 것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게 합리적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대해주었으면 싶다. 최근 친구들과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라 그때의 미성숙한 행동을 서로끼리는 이해해주리라며 할 때면, 나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그래서 조금은 둥글게 살려고, 내게만 피해 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단톡방에서 연예인으로 추정되는 음란물을 공유할 때 나는 그 방을 나와버렸다. 정확히 차분하게 문제를 직시하면 감정만 나빠지니까. 인권에 대해 얘기한들 가식이라며 뭐 그리 불편하냐며 듣지도 않을 테니까.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 종이책 164P


예술은 미세한 선을 발견하고 그 선을 파고드는 데 있다. 그 선 사이에서 도덕과 감정을 논하는 것. 예술은 마냥 방탕해도 용서되는 것이 아닌 규율과 자유 사이를 제시하는 것. 그것으로 내 삶과 주변을 비평하는 것.




질문


힘으로 보호해주거나 식량을 조달해주어 원하는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안전이 문제가 될 때는)고대 스파르타, 12세기 유럽) 용기 있는 투사나 말을 탄 기사가 존경을 받는다. 재빠른 동물의 고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는 공동체에게는(아마존 지역) 재규어를 죽이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더불어 그 상징인 아르마딜로 허리띠를 얻는다. 교역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기업가와 과학자가 존경의 대상이 된다(현대의 구미 지역).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지 못하는 집단은 지위를 잃게 된다. 안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의 근육질 남자들이나 정착을 한 농업 사회의 재규어 사냥꾼들의 운명이 그런 경우다.

어떤 집단은 선한 태도, 신체적 재능, 예술적 솜씨, 지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도 있다. - 종이책 226P


1) 한국의 과거와 지금의 한국에서는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했고, 필요할까? 앞으로는 또 어떤 능력이 필요하게 될까? 높은 학업 점수와 비판적이기보다 복종하는 태도가 아닐까. 하지만 요즘 보면 연예인이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대두되는 걸 보니 이목을 끌고 웃음을 주는 능력이 앞으로의 높은 지위를 얻는데 절실한 능력이 되지 않을까? 공감하고 빠르게 적용하는 능력?


2) 지위가 없다면 자존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지위가 없는 상태에서 자존감은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운동을 생각해봤지만, 우울하면 운동조차 하기 싫고 억지로 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현실 문제에 직면하는 것 말고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