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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잠수자 <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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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잠수자 <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

온화수 2018. 10. 31. 08:12



밑줄



"나는 잠수하는 모든 이를 사랑한다. 어떤 물고기도 표면에서는 헤엄을 칠 수 있다. 하지만 5마일도 넘게 내려가려면 고래 정도는 되어야 한다. …… 세계가 시작된 이래 사유의 잠수자들은 충혈된 눈을 하고서 표면으로 되돌아왔다." 멜빌이 '사유의 잠수자들'의 운명처럼 말했던 그 고래를 나는 이 책에서 느낀다. 삶과 죽음, 이성과 광기가 골려 있는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사상가의 초상 말이다. - 38P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위대한 사건은 소란스럽지 않다. 분출하는 화염과 시커먼 연기는 사람들의 눈을 빼앗고 싶은 거짓 불개들에게나 필요한 것.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듯, "소란과 연기가 사라지고 나면 별로 일어난 일도 없지 않던가." 그 속에서는 고뇌하는 영웅조차 삼류 배우에 불과하다. 가장 큰 사건이 소박한 한 걸음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사람들은 지하로 이어진 길 언저리에서 피어오른 화염과 연기, 그리고 기적을 행한 영웅의 이야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러나 정작 지하에 다녀온 이는 중저음을 낸다. 대지에 먹혀 대지의 목소리가 된 자는 나지막이 말한다. 소란이 사상을 죽인다. - 제 2장 수치스러운 기원 소개 글


그러나 어떤 곤충에게는 그것이 빨갛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빨간 사과'는 '사과'만이 아니라 우리 시신경과도 관계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과'와 우리 '눈'이 '빛'을 매개로 맺는 관계를 사과라는 한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생각한다. - 46~47P



  누군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군가 피를 토할 때, 우리가 그에게 뛰어가는 것은 과연 동정 때문일까? 우리가 '동정'이라고 말하는 다양한 사례는 언뜻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는 생각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을 지극히 강하게 생각하기에(그것이 무의식적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한 우리에게 모욕감을 준다. 우리가 그를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의 무력함과 비겁함을 깨닫게 된다." "또 타인의 불행은 이미 그 자체로 타인에 대한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한 명예를 감소시키는 동기가 된다. 또는 타인의 불행과 고통은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위험을 가리킨다. 또 인간의 위험한 처지와 연약함을 가리키는 징표만으로도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즉 우리는 타인이 우리 앞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무력감 내지 모욕에 대해 타인을 돕는 행위를 통해 복수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타인의 고통은 우리 고통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의 고통이 그에게 고유한 것처럼 우리 고통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타인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동정'이라고 부르는 행위로 (니체는 우리의 습관을 따라 불가피하게 이 말을 쓴다고 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서 제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통뿐이다.

  물론 '고통의 제거' 역시 동정이라 불리는 행위를 하게 만드는 하나의 작은 동기일 뿐이다. 동정적 행위에 개입하는 동기들, 그 배후 충동들은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어떤 쾌락의 충동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저런 처지에 처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또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도와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때, 또 우리가 도와줄 경우 찬양과 감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도와주는 행동이 성공을 거두어 돕는 사람에게 뿌듯함을 줄 때, 특히 우리 행동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어떤 불의를 누르거나 제거한다는 느낌이 들 대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보다 "훨씬 더 정교한 것까지 포함해 이 모든 것이 '동정'이다. - 116~117P


철학자는 해결하려는 자보다는 삶의 촘촘함 사이를 경계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니체는 말했다. 우리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근거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기초해 도덕적 판단을 하고 있다고. 그러나 도덕적 행위의 근거 없음 내지 오류를 지적했다 해도 니체가 부도덕한 행동을 우리에게 촉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다만 다른 감각, 다른 가치평가를 바라는 것이다. - 121P


고대나 중세적 인간들이 점성술만으로도 미래를 확신하고 대담한 모험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반면, 훨씬 더 많은 지식으로 무장한 근대인들은, 그만큼 커진 불안과 회의 때문에 대담하게 행동할 수가 없다. - 132P


  근대인에게는 항상 시간이 없다. "현재 유럽인은 모든 중요한 문제를 반어적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그들의 일로 너무 바빠서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근대인들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잉태할 수 있는 깊은 침묵"의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사건에 쫓겨 다닌다. 자신이 익을 수 있는 '때'를 기다릴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근대인의 문제이다. 근대의 젊은이들은 인격도 재능도 근면함도 갖추었지만 오직 하나, "스스로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어진 방향에 길들여졌다. 그들은 이용되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박탈당했고,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는 것이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잠시 쉬는 것이 '휴가'의 이름으로 허용되었지만. 어떻든 이 시스템에서는 바퀴가 되어 돌지 않으면 바퀴에 깔려 죽게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연고를 찾고', '추천을 받고', '철저히 순응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스스로를 "그다지 책임을 느끼지 않고도 남용하고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의 싸구려 도자기"로 만드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널려 있다. 나를 가져가라! 거리낌 없이! 한마디로 근대인들의 세기는 '과도한 노동의' 세기이며 그렇게 해서 '닳아 없어지는' 세기이다. -136~137P


니체의 말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과도한 노동의 세기라. 조직 시스템에 의해 과도한 노동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받아들이거나 그 일이 좋아서 몰두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싸구려 도자기라도 각자의 의미가 있다. 물론 눈 앞만 보기보다 멀리 삶을 관망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각자에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아쉬운 마음에서 지적할 수는 있으나 절대적일 수는 없다.

익을 수 있는 때란 무엇일까. 여러 경험으로 자신이 익어간다고 생각이 들 때면 서른은 넘지 않을까? 서른이라고 해서 못할 일은 없지만 나이 제한이 있는 일도 많다. 그 때. 익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허용하는 사회 구조가 되었으면.




  니체가 272절에서 '종족'〔인종Rasse〕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은 어떤 '본래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순수한 종족은 없고 순수하게 된 종족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말이 그것을 말해준다. '순수한 인종'이란 주어진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순수성은 끊임없는 시도의 결과("수많은 적응과 흡수 그리고 분리의 최종 결과")이다. 나는 여기서 '순수성'을, 앞서 니체가 근대인을 가리켜 비판했던 '잡식성' (특이성 없음, 취향 없음)과 대비해서 이해한다. 기묘하게도 여기서 니체가 말한 '순수성'은 이질적인 것들을 솎아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엮어낼 수 있을 때(처음에는 조화되지 않은 성질들, 그래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그런 투쟁들이 조화를 이루며 통일성을 갖게 되었을 때) 달성되는 특이적(유일무이한singular) 아름다움이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조각했던 그리스인들의 예술적 역량〔능력〕은 그렇게 '그리스적인 것'이라는 순수 특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스인은 이를 통해 다른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그리스인이 될 수 있었다.

  니체는 272절의 마지막에 "순수하게 유럽적인 종족〔인종〕과 문화 역시 언젠가를 성취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다. '그리스적인 것'의 생성이 '그리스 인종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듯, '순수하게 유럽적인 종족〔인종〕과 문화'도 배타적 유럽(중심)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방금 전에 보았던,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언급했던, 오히려 독일의 인종주의가 그 조건을 악화시켰던, '유럽의 여러 민족을 엮는 과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하면 예술적 역량을 발휘해 여러 민족을 질료로 특이적 유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을 '위대한 정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니체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는 '너는 네 자신이 되어야 한다'Du sollst die werden, die du bist고 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이것이 또한 '그리스인은 그리스인이 되어야 한다' , 그리고 '유럽은 유럽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위대한 예술적 사명이다.


■ 니체는 '너는 네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곧잘 사용했다.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스스로를 '일찍이 적절하게도 '네 자신이 되어라'Werde, der du bist라고 말한 바 있는 인도자이자 양육자, 훈계자"로 칭했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는 '저마다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소수만이 실제로 하나의 재능 있는 사람' , 즉 "그 자신이 되는 것"er wird, was er ist이라고 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권 서문에서는 니체 자신의 저서가 곧 "자신이 극복해온 것"들이며, 거기서 바로 "가장 독자적인 '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를, '사람은 어떻게 그 자신이 되는가'Wie Man wird, was Man ist로 달았다. 니체의 철학은 결국 가장 독특한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예술적 '생성'이자 그것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189~190P



  우리가 고독을 '떠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떠남'일까. 일단 고독은 현재로부터, 자기 시대로부터의 떠남이다. 506절에서 니체는 '좋은 작품'이란 그것을 산출한 시대로부터 떠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시대의 축축한 공기'를 말리는 일에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새롭고 좋은 어떤 작품이라도 그것이 그 시대의 축축한 공기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에 시장과 적대 세력, 최신의 의견 그리고 내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모든 무상한 것의 냄새가 너무나 많이 배어들어 있기 때문에 가장 적은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가? 나중에 작품은 건조해지고 '시대성'은 사멸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시원한 빛과 좋은 냄새뿐만 아니라, 만일 그것이 영원의 조용한 눈을 추구하고 있었다면 그 눈 역시 얻게 된다."

  시대의 습기를 말리는 일을 우리는 니체의 표현을 따라 현재의 '색이 바래는' 일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미치는 시간과 공간이 넓어질수록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더욱 색이 바래고" ,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우리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우리는 사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담쟁이와 포도덩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고독해진다는 것은 현재로부터 떠나면서 또한 이웃들로부터 떠난다는 의미이다.

  니체는 여기서 특히 민족주의적 열광에 도취된 독일 대중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정열로 모든 의심과 학문, 비판, 이성을 잠재우려 하고, '역사가 자신들을 위해 증언하도록 역사를 왜곡'해야 하는 사람들, 정열을 진리의 논거인 양 제시하고 끝내는 그것을 하나의 양심이자 무구함으로 믿어버리는 사람들로부터 니체는 떠난다. "이 순간에 그대들은 투쟁, 도취, 분노, 희망 속에서 망아의 상태에 빠져 모든 의심을 넘어선다. 이 순간에 그대들은 그대들처럼 망아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은 진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그대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 그것은 지성이 타락한 상태다─ 그대들과 동일한 믿음을 갖는 인간들을 발견하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화염으로 그대들의 불꽃을 점화하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물론 이 성향은 이성이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하며 '내적 감각'이나 '지적 직관'을 더 중시했던 당대의 철학 성향과도 관련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철학 아래서 자신을 어떤 초자연적 마력을 가진 존재로, 어떤 불가사의한 특권, 어떤 '예술적 본성'의 소유자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종교다!" -199~200P


현재 한국 사회를 보는 듯하다. 지성을 지식을 갖고 자기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왜곡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년과 노년에 이르러 인생을 판단하는 것에는 최고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특히 노년은 저녁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매력적인 도덕으로 변장하기를 좋아하며 저녁놀, 황혼, 평화로운 고요함이나 동경으로 가득 찬 고요함에 의해 낮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년에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통찰력을 갖게 된 것처럼 자신의 인생과 업적과 역정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지혜가 아니라 피로가 존재한다."

  정신의 노쇠함에 빠진 현자들은 자신에게 예외적 지위를 쉽게 허용한다. 그는 "이제 사태들을 보다 가볍게 취급하고 증명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천재로 선포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여긴다." 그리고는 외견상으로는 과거 자기 사상의 문제들을 고치면서 자기 업적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솎아내고 자기 사상을 향유하려고 한다. 이제는 더 나아가기보다 적당히 즐기며 쉬고 싶은 것이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고독, "앞으로 날아가는 모든 정신이 살고 있는 저 무서운 고독"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당원, 회의하지 않는 동지, 지원군, 전령, 화려한 행렬"을 열망하고, 자신이 "경외, 공동체, 감동, 사랑의 대상"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도화된 기관을 세우려 하며 어 이상 사상의 건축물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 '위대한 노인'이 원하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의 사원이다." 그는 사유의 격량이 되느니 그것을 막는 "방파제로 영구히 남으려 한다." 그러나 사상가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성인의 명부에 올림으로써" , "자신의 사망증명서도 발급"하는 것이다. -209P


30대인 나만 해도 그렇다. 벌써부터 현실이라며 도전보다는 안락한 선택과 고민한다. 도전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말을 들으니 요즘 고민하고 있는 아득한 선택지가 조금은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