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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표현 방법에 대한 성찰

온화수 2014. 11. 26. 16:03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관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긍정적인 사람의 표정과 부정적인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르며, 그들이 걸리는 병의 형태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격에 따라서 그들의 표정이나 걸리는 병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핍진성의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는 제외한다. 인물의 성격뿐만 아니라 사건도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진행한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뒤에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는 보편적인 패턴이 있다. 여기에도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소설에서는 무의미하다.(예외적이라면 독자들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인물들도 인과의 사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소설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핍진성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방해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한다. 핍진성은 소설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다. 소설가는 구체적인 문장을 넘어서 핍진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많은 독자들이 내게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핍진한 문장보다 구체적인 문장이 더 좋아요’로 이해한다. 물론 구체적인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해해주기를. 지금 나는 허구의 세계를 문장으로 창조해서 실제 감동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플롯을 짜는가가 모두 이 핍진성에 기초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중에서


우선 핍진성이란 예를 들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들은 자라서 폭력적인 아버지가 된다'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치자. 이건 개연성의 측면에선 별로 문제될 게 없는 이야기이다. 그 나름대로의 인과관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핍진성까지 갖추려면 이것으론 부족하다. 원인과 결과 이외의 것들,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맞을 때 아들이 보았던 하늘빛이라든가, 저도 모르게 씰룩이던 입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나날 중 꾸었던 꿈들과, 비가 내리면 저도 모르게 어딘가로 뛰어가던 시간들, 그렇게 스토리에서 빼도 상관없는 묘사들, 그런 잉여들까지 세밀하게 포함되어야만 비로소 핍진성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핍진성들이 허구를 사실보다 더 사실답게 만들어 준다.(한국일보, 2014-04-07, '개연성과 핍진성의 차이' 인용)

 

소설에 대한 내용이지만, 읽으면서 나를 되돌아봤다. 과거, 내가 어떤 생각을 표현할 때, 표현 방식에 제약이 없으면 멋지다는 생각에 뱉기만 했고 책임지지 못했다. 물론, 아이데이션 과정에서 뱉기도 전에 이미 제약하는 건 나쁜 습관이지만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근거가 부족했다.

 

어느 정도 과정이 진행되고, 더하고 빼는 과정에서, 내 생각엔 개연성은 있었지만 핍진성이 없었다는 걸, 위 책을 읽고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아이디어를 낼 때, 개연성만 있으면 뻔한 게 되고, 개연성이 있으면서도 ‘다른 게’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세상에 없는 아이디어를 찾으려 했다. 지금도 잘 모르지만, 개연성만 있으면 일단 잡고 ‘핍진성’에서 꾸준히 오랜 시간을 두고 풀어야하는 게 아닌가, 요즘 드는 생각이다.

 

광고로 예를 들면, 일반 소비자들이 기피하기도 하고, 과장된 내용이라고 생각들 한다. 그런 콘텐츠를 붙잡아두려면 뻔한 얘기지만, 개연성 있게 만들되, 핍진성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신선하고 진심이어야 한다. 결국 소설도, 광고도, 상사를 설득할 때도, 이성에게 고백할 때도, 개연성이 있어도 핍진성이 없다면 효과가 적다는 게 아닐까. 진심을 더욱 진심답게 핍진성을 표현해야 한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읽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