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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요양소
노인은 팔십사 일 내내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처음 사십 일까지는 한 소년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사십 일이 지나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이제 정말 살라오(Salao, '운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스페인어_옮긴이)에 빠지고 말았다고 했다. 노인의 운이 다할 대로 다했다는 것이다.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로 옮겼고, 그 배는 바다로 나간 첫 주에 큼직한 물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다. -7P 나는 미용 실기 시험에 4번을 낙방했다. 5번째 시험을 봤는데 내일 결과가 나오지만 불확실하다. 중반까진 나름 능숙했는데 중반 이후 큰 실수들을 했기에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으니까. 운 좋게 붙으면 정말 감사한 거고, 떨어지면 다시 매진할 수밖에. 노인은 ..
죄와 벌을 읽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소도시와 한국 사회가 떠올랐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곳이 소설의 배경인데,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새로운 것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사회 정책에 관심이 없는, 아는 정치인이나 뽑았던 정당을 매번 뽑는 듯한 분위기의 동네. 소설 속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러했다. 또한 한국 사회처럼 느낀 이유는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를 보고 떠올랐다. 무언가 마음의 충동에서 일어나는, 옳다고 느껴지면, 다양한 입장을 듣기보다 싸워서 이기려는 감정적 행동. 민족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많은 이들에게 해를 입히는 전당포 노파를 정의를 위한다며 주인공은 살인을 저지른다. 사회의 법이 썩었을진 몰라도 노파는 법을 어기거나 하진 않았다. 주인공 라스..
법정스님의 삶을 증언과 문헌을 취재해서 쓴 백금남님의 장편 소설이다. 속세에서의 어린 날부터 입적하시기 전까지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다. 법정스님의 세속 이름인 재철이라는 아이의 환경과 삶, 젊은 날 중이 되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과의 이별, 스쳐가는 인연들, 세속의 끈인 글만은 놓지 않았던 그, 종교를 넘나드는 진리의 인연, 시인 백석의 연인 나타샤와의 만남, 안거 중이라 못 찾아뵙던 어머니의 장례식, 법정의 죽음, 인연의 생성과 소멸 사이에서 발현되는 진리의 언어들. 400쪽이 넘는 소설을 상상하며 읽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에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의 글쓰기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는데 법정스님의 삶을 통해 힌트를 받았다. ㅡ죽음이 무엇일까. 아무리 높은 선지식을 얻었다고..
이 책을 산지는 반년이 넘었다. 베스트셀러에 목 메진 않지만, 어떤 책이 사람들을 자극하나 확인하고 싶어 서점에 가면 늘 살펴본다. 반 년 전 외국 소설 부문에 이 책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전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다. 나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에세이를 읽어본 적은 있다. 가끔 테드에서 강연 올라오거나, 그의 기사들을 관심 있게 살펴볼 뿐이었다. 이 책을 사놓고 덮게 된 이유는 번역된 문장이 부자연스러워서 이해하는데 걸리적거리는 게 많았다. 철학자라서 전문 용어가 많은 걸까,하고 살펴보니 그리 어려운 용어는 없다. 문장이 부자연스럽지만, 내가 참을성이 없던 탓도 있었다. 일주일 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어느 문장에 내 맘을 사로잡았고, 나는..
저는 소설을 즐겨 읽지 않습니다. 책 읽기는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은 뭐랄까. 제게 너무 어려워요. 경제학이나 사회학, 심리학, 철학 서적들은 길어도 집중력 있게 읽어나가는데. 소설은 계속 상황을 상상해야 해서 머리도 아프고 명쾌하지 않다랄까요. 그런 의심이 소설 읽는 내내 자꾸 올라와서 끝까지 읽기가 참 힘들어요. 문학적 글쓰기는 잘하고 싶으나 문학은 멀게만 느껴지는. 그 정도의 수준이어서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언급하기가 머뭇거려지네요. 저는 은희경 작가의 책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개인적으로 '중국식 룰렛' 소설집은 별로라고 말하고 싶어요.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했고, 얌전한 사람들의 얌전한 이야기 같았어요. 제 삶이 평범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방황하는 캐릭터들을..
도착한 곳은 서울 북쪽의 한 고시원이었다. 요즘엔 나름 시설이 세련된 고시텔이라고도 불리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정말 고시원 중에서도 최악의 고시원이었다. 침대 시트는 스프링이 휘었는지 굴곡져 있었고, 냄새도 요상했다. 벽엔 바퀴벌레 한 마리가 천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의 사진이었다. 외할머니는 고시원 근처의 강변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K는 혼자 거주하고 있던 외할머니의 고시원 짐을 정리해야 했다. 그는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총무에게 물은 후 기웃거리며 찝찝한 화장실 손잡이를 몸쪽으로 당겼다. 찬 공기가 먼저 느껴졌고, 소변과 나프탈렌이 섞인 불쾌한 향이 코를 찔렀다. 숨을 막고 힘들게 소변기 앞으로 다가갔다. 소변기 아래엔 노인의 새치 같은 힘없는 잿빛 털들이 2센티는 될..
A는 한 달만에 콜센터를 그만두었다. 어떤 목표도 더는 상실했으며,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수습 기간 중 퇴사한 것인데, A의 입장을 들어보자면 이렇다. 애초에 전화 받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만연했고, 은근히 영업을 해야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영업직이 아니어도 여느 회사를 가도 그런 부분이 있는 거겠지만, 예민한 A에겐 너무나도 거대한 거인의 그림자로 다가왔다. 처음엔 전화만 받는다고 하다가, 점점 영업을 하게 만들었다. AS 전화를 받다가도 접수를 끝내면 바로 서비스의 연장인 척 영업을 하는 것이다. 지금 순간을 견뎌서 버텨낸들, 또 다른 장벽이 끊임없으리라,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A에겐 과거 그런 경험이 있었다.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나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패배자 취급을 하려 한다..
친구 중에 상섭이라고 있어. 걘 대학을 그저 졸업만 하고 3년간을 방황했어. 언론사며 광고 회사며 짧았던 인턴들, IT쪽에도 덤벼보기도 했고, 타지에 숙식하며 망노동을 하기도 했고, 옷 매장, 편의점, 생수 공장, 아파트 계량기 교체 등등 더 나열하기에도 벅찬,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을 전전했어. 그 친구가 알바를 많이 했다는 게 요점이 아니라, 참 수직적으로 격차가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스쳐간 거 같아서 신기하기도 해. 유별난 놈이야. 상섭은 내게 술자리에서 그런 얘길 한적이 있어. “나름 기득권이란 사람부터 밑바닥 사람들과도 인연을 맺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 허무해져만 가더라. 기득권과 연을 맺으면, 내 스스로 그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멀리하게 되고, 밑바닥 사람들은 격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