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담론> - 신영복 지음 본문

책 사유/인문학

<담론> - 신영복 지음

온화수 2018. 12. 20. 20:03
담론 - 6점
신영복 지음/돌베개


다소 광범위한 주제가 모여 있는 책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지인이 이 책은 그동안의 쓴 책들을 축소해서 낸 책이라는 얘길 해서, 아... 이해가 갔다. 이 책만 읽으면 난해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 됩니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리엔트에서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 반도로, 다시 알프스 북부의 오지에서 바흐, 모차르트, 합스부르크 600년 문화가 꽃핍니다. 그리고 북쪽 바닷가의 네덜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그 중심부가 이동합니다.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은 중심부가 변방으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주입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서쪽 변방의 진나라가 통일햇습니다. 글안과 몽고와 만주 등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중심부에 주입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 의미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방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입니다.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전복하고, 상투적인 언어를 전복하고,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카타콤catacomb이며 그 조직 강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경』의 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계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강녀 전설을 소개했습니다. 맹강녀는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동원되어 몇 년째 소식이 없는 남편을 찾아갑니다. 겨울옷 한 벌을 지어서 먼 길을 찾아왔지만 남편은 이미 죽어 시체마저 찾을 길 없습니다. 당시에는 시체를 성채 속에 함께 쌓아 버렸다고 합니다. 맹강녀는 성채 앞에 옷을 바치고 사흘 밤낮을 통곡했습니다. 드디어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옷을 입혀서 곱게 장례 지낸 다음 맹강녀는 노룡두에 올라 바다에 투신합니다. 맹강녀 전설이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한가 하는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설 쪽이 훨씬 더 진실합니다. 어쩌면 사실이란 것은 작은 레고 조각에 불과하고 그 조각들을 모으면 비로소 진실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언어를 뛰어넘고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의 창조인 셈입니다. 우리의 세계 인식도 이러해야 합니다. 공부는 진실의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공부는 세계와 인간을 잘 알기 위해서 합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추상력과 상상력의 조화입니다. 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문사철이 바로 개념과 논리로 압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에 대한 온당한 인식틀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미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이 겨울 추위를 정직하게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한매, 늦가을 서리 맞으며 피는 황국을 기리는 문화가 바로 비극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글씨도 사람과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나름 산전수전을 겪어 왔습니다. 글씨 보는 안목은 그렇지 못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은 상당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목구비나 언행이 반듯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그런 사람이 아마 좋아 보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쯤은 생각이 상당히 달라졌으리라 봅니다. 어리숙하고 어눌하더라도 어딘가 진정성이 있는 점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작위가 개입되면 그 격이 떨어집니다. 인위적인 것은 글자 그대로 위입니다. 거짓이 됩니다.


이성주의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인간 이성이 모든 무지를 밝힐 수 있다, 이성이 촛불로 어둠을 밀어낼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촛불을 끄라고 합니다. "촛불을 꺼라! 촛불은 어둠을 조금 밀어낼 수 있을 뿐 그 대신 별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엿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