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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은
계절로 치면
더운 공기는 남아 있지만
햇빛은 점점 짧아지는
늦여름의 오후 같았다.
가끔은 여전히 웃고 떠들 수 있지만,
그 웃음이
어떤 피로의 끝에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이젠 쉽지 않다.
어릴 땐 가볍게 말을 걸고
웃으며 앉을 수 있었지만
서른여덟은
더는 어리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가볍게 다가가는 일이
망설여지는 나이였다.
상처받는 일보다
상처 줄까봐 조심하는 일이 많아졌고
가깝게 다가가는 대신
서서히 멀어지는 선택을 할 때도 생겼다.
하루는 일하고
퇴근하면 조용했다.
몸은 괜찮은데
마음은 어딘가를
다녀온 것처럼 피곤했다.
쉬는 날 전날이면
괜히 집에 곧장 들어가기 싫었다.
어디론가 향하는 척
잠깐 돌아 걷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끔 술이 생각났다.
심심해서,
멍해서,
공허해서.
때로는 이유 없이,
그냥 그런 밤이 있었다.
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에
무언가 일어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그럴 때 잠깐,
조용히 스쳐갔다.
예전엔
만남이 자연스러웠다.
학교 복도, 친구의 생일파티,
소개 없이도 이름을 알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임에 애써 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얼굴도 생기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젠 감정보다
일정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세상은 조용해졌고
그 틈에 나는
술을 한 잔, 조심스럽게 부었다.
어떤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 공허함은
퇴보가 아니라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전의
잠시 멈춤일지도 모른다.
자극으로 살아가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의미로 이어지는 삶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예전엔
재밌는 일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내가 나를 느끼는 일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에도
내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게 어쩌면
자기이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허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다음으로 건너가기 전의
작은 고요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가끔 웃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고,
오늘 왜 마시고 싶었는지
세 줄만 적어보고,
누구라도 마주할 수 있는
나를 위해
짧은 말을 하나 써보는 것.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 사이에
나는 나 쪽으로 조금씩 돌아올지도 모른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통해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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