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윤성근 본문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인상이 50일이 지나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글도 첫 문장이 매력적이지 않거나 다음 문장을 궁금하게 만들지 않으면 몰입도가 떨어진다. 더구나 요즘처럼 영상에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짧은 호흡의 글을 선호하는 시대에 첫 문장은 더더욱 중요하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은 저자가 첫 문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23가지의 소설을 예와 함께 생각을 풀어 쓴 책이다. 카프카 <변신>, 이상 <날개>,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보코프 <롤리타>,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사르트르 <구토>,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등등...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의 첫 문장
23가지 첫 문장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였다. <롤리타>와 같은 이마 위에 곧바로 그림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문장도 좋지만, <말테의 수기>처럼 심심하면서도 평범한 문장으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 말을 하는지, 눈 앞의 그림이 아니라 내용의 그림이 그려지는 문장을 나는 더 선호한다.
<말테의 수기>의 경우, 이곳으로 살기 위해 오지만,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고 했을 때, 도시의 경쟁을 떠올렸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게, 첫 문장을 바탕으로 내용이 이어지고, 사색할 수 있는 저자의 생각이 이어지면서 빠져들었다. 위 사진은 멜빌의 <모비딕> 부분인데, 저 글은 소설가에게만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목표에 다가가는 법을 알려준다. 사랑하는 것, 신념을 내걸 수 있는 것을 찾았으면,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그저 그걸 매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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