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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 본문

심리철학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

온화수 2014. 8. 17. 12:42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저자: 알랭드 보통 지음·정명진 옮김

출판사: 생각의 나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 없이 단지 몇 명만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는 사실……. 훌륭한 의견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 그것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지…….

그러니 훌륭한 나의 친구여, 우리는 민중이 우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마음 쓸 필요가 없소. 하지만 전문가들이 정의와 불공평의 문제에 대해 하는 말에는 신경을 써야 하오.

-8P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이미 인생의 황혼녘에 다다른 마당에 나는 원하노라. 죽음이 덮치기 전에 쾌락의 충만함을 축하할 훌륭한 송가를 하나 만들어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된 사람들을 돕기를.

-72P




쾌락주의의 핵심에는, ‘무엇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을 못지않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 직관적으로 대답하는 데 우리 모두가 서툴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가장 쉽게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답은 자칫 틀린 답이 되기 쉽다. 우리의 영혼은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육체보다 더 명쾌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직관적인 진단들은 좀처럼 정확하지 않다. 두개골 자르기는 심리적 자아를 이해하는 것 또한 육체적 자아를 해독하는 일 못지않게 어렵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한 남자가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척 어렵고, 표정이 늘 뾰로통하고 가족과도 거리감을 느낀다. 직관적으로 그는 그 원인을 자신의 잘못된 직업 선택으로 돌렸으며, 값비싼 대가를 감수해가면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 마을 들여다보기』를 참조했다. 고기잡이를 하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신속히 결정하고서 그 남자는 시장에서 그물과 비싼 진열대를 하나 샀다. 그래도 그의 우울증은 누그러들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종종, 에피쿠로스파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이 앓는 병의 원인을 모르는 병자’와도 같다.


우리가 의사를 찾는 것은 그들이 육체의 병을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영혼이 편치 않을 때 우리는 철학자들에게 기대야 하고 의사와 비슷한 기준에 의거해 그들을 판단해야 한다.


의학의 경우 육체의 병을 물리치지 못하면 아무런 이점을 주지 못하듯, 철학 역시 마음의 고통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무용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시작에서 보면,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우울증과 욕망의 충동을 해석하도록 돕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그릇된 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었다. 우리 인간은 당장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 대신 에피쿠로스보다 백 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정의들을 평가할 때 동원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방식에 따라 우리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그렇게 말했을 때 철학은 우리의 고통을 합리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우리의 병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88~91P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식솔들은 대가족을 닮았으나 집안엔 우울함이나 구속감은커녕 호감과 친절만이 가득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친구들은 우리를 알아봐주고 돌봐줌으로써 우리에게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많은 친구들은 짧은 말로나마(그중 상당수는 우리를 괴롭히는 말들이지만) 우리의 단점을 지적해줄 뿐 아니라 그런 단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한다는 점을 밝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이 세상에 설자리를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친구들에게서는 “그 사람 참 무섭지 않아?”라든가 “너는 이런 느낌 받지 않았어?”라는 질문을 던지면 “뭐, 별로”라는 시큰둥한 대답보다는 이해한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혹여 시큰둥한 반응을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조차도 극지를 여행하는 탐험가만큼이나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진정한 친구들은 절대로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자아다. 이상적인 부모들처럼, 우리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은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앞에서는 낡은 옷을 걸치거나, 올해는 돈을 거의 벌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아마 부에 대한 욕망도 호화로운 생활을 향한 단순한 갈증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더 중요한 동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훌륭한 존재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만약에 돈을 모으지 않았다면 우리를 무시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관심을 끌어내려는 이유만으로도 부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삶의 기초가 되는 우정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진정한 친구는 큰 재산으로도 얻을 수 없는 사랑과 존경을 베푼다는 점을 인정했다.



자유


에피쿠로스와 그의 친구들은 두 번째 급진적인 변혁을 일궈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기들에게 치욕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변덕스러운 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위해 아테네 상업 세계의 고용 관계에서 자신들을 제외시키고(“우리는 일상과 정치라는 감옥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했다”), 독립을 누리는 대신에 보다 검소한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일종의 공동생활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돈은 보잘것없었을지 몰라도 대신 그들은 다시는 불쾌한 상관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집 근처의 낡은 디피론 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정원을 사서 반찬용으로 약간의 채소들을 가꾸었다. 아마도 양배추, 양파 키나라(오늘날의 아티초크의 조상으로, 아랫부분은 먹을 수 있지만 껍질은 먹지 못하는 식물) 같은 것을 재배했을 것이다. 그들의 식단은 호화롭지도 않았고 풍성하지도 않았지만 먹음직스럽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으로 채워졌다. 에피쿠로스가 자신의 친구 메노에세우스에게 설명했듯이,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그러한 소박함은 친구들의 위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테네가 중히 여기는 가치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물질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집의 벽을 높이 쌓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황금을 자랑삼아 내보여도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아테네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사는 친구들 사이에는, 서로에게(경제적으로) 입증해 보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색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공동체가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그 ‘정원’에서 사색하고 토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에피쿠로스의 친구들 중 상당수는 작가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한 예로 메트로도로스는 12권의 저작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지혜의 길』과 『에피쿠로스의 허약한 건강에 관하여』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멜리트에 있던 그 집의 공동휴게실과 채소밭에서는 지적이고 동정심 넘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자리게 계속되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특히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들이 돈이나 질병, 죽음, 그리고 초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분석하는 요령을 터득하도록 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누구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죽음 뒤에는 망각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죽음)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했다. 인간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어떤 상태를 두고 미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93~97P



1. 행복을 위한 설계를 한 가지 세워라.


휴일에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빌라에 살아야 한다.


2. 그 설계가 잘못일 수도 있다고 상상해보자. 욕망의 대상과 행복을 연결하는 것에 예외적인 경우들을 찾아보라. 욕망의 대상을 소유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빌라를 구입하는 데 돈을 쓰고도 여전히 불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빌라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붓지 않고도 휴일에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3. 한 가지 예외라도 발견된다면 그 욕망의 대상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친구가 없어 외로움을 느낀다면 빌라에서도 비참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텐트에 묵는다 해도 행복할 수 있다.


4. 행복을 엮어내는 데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최초의 설계는 지금까지 나타난 예외까지 고려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호화 빌라에서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단, 그 행복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누군가의 평가를 느끼는 한에 있어서 나는 빌라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


5. 이제 진짜 필요한 것은 혼돈에 빠졌던 애초의 욕망과는 매우 다른 것 같다.


행복은 멋지게 장식한 빌라보다는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

-104~106P




동물은 자신의 목을 매고 있는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밧줄을 더 단단히 조이는 결과가 된다. ……순응하지 않고 마구 몸부림친다고 해서 묶여 있는 동물의 고통이 덜해지도록 적당히 느슨하게 만든 멍에는 이 세상에는 절대로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숙명에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란 도대체 뭔가? 약간의 충격, 약간의 타격에도 터지고 마는 혈관…… 자연 상태에서는 무방비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고, 운명의 여신이 내리는 모든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발가벗은 육체.

그대는 말하겠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라고.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질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우리는 따라야 하고, 이 법을 우리는 준수해야 한다. ……당신이 개조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118P



세네카의 명상


(현명한) 사람들은 하루를 생각으로 열지.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아.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인간의 운명도 도시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지.

엄청난 노고의 대가로, 그리고 신들의 위대한 배려로 수많은 세월을 두고 착실하게 올려진 건물일지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사라질 수 있나니. 아니지, ‘하루아침’이라고 말한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치는 불운을 감안하면 유예기간을 지나치게 길게 잡고 있어. 한 시간, 찰나의 순간도 제국을 넘어뜨릴 수 있거든.

아시아의 도시들이, 아카이아의 도시들이 얼마나 자주 단 한 차례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시리아의 도시들이, 또 얼마나 많은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한 차례의 지진에 삼켜져버렸던가? 이런 참화가 얼마나 자주 키프로스를 쑥밭으로 만들었던가?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것들에 묻혀 살고 있네.

누구나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고, 우리 역시 죽을 운명의 아리를 낳는 법이야.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지.

145~146P



은퇴 이후로 독서가 나를 위로한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고통이 엄습할 때도 그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그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냥 책에 기대기만 하면 된다.

-몽테뉴, 186P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거나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이 한갓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이 멍청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이심해보지 않았던 키케로 같은 철학자들이 가장 멍청한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이성에 대한 그릇된 신뢰는 백치의 뿌리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부적절함의 근원이기도 하다.


자신이 명구를 새겨 넣은 나무 들보 아래에서 몽테뉴는 새로운 철학의 윤곽을 그려냈다. 그 철학이란 고대의 사상가들이 우리를 안내하고자 했던 길로부터 우리 인간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잃거나 광기에 휩싸이거나, 야비하거나, 흥분한 영혼들이기 때문에 동물들 옆에 서면 많은 점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건강하고 덕스런 존재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철학자들이 꼭 반영했어야 할 현실이 이러한데도 그렇게 한 철학자는 드물었다.


우리의 삶은 일부분은 광기로, 또 다른 부분은 지혜로 구성된다. 그래서 인생에 대하여 그저 공손하게, 그리고 관습대로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반 이상을 뒤에 버려두고 가는 셈이다.


게다가 인간의 약점을 수용하고, 우리가 결코 갖지 못한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관대하면서도 속죄의 성격이 강한 몽테뉴의 철학에서 반은 지혜롭고 반은 멍청이 같은 삶의 방식으로도 여전히 적절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3~194P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아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는 한 가지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라고 대답했다.

-몽테뉴, 226~227P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뭔가를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들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용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

선뜻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그 사람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아는가” “그 사람 시와 산문을 쓸 줄 알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 사람은 더 선해지고 현명해졌는가?”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오성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공허하게 비워놓고서 오로지 기억을 채우기 위해 분투한다.

-241P



난해함이란, 말하자면 학식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문의 공허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마법을 걸어 불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으로 손에 쥐기를 갈구하는 한 닢의 동전과 같다.


철학자들이 길거리나 시장에서 통하지 않을 단어들을 사용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개인적이거나 독특한 패션으로 관심을 끌려고 드는 것이 옹졸한 마음의 상징이듯, 연설도 그와 똑같다. 새로운 표현이나 널리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신출내기 학교 선생 같은 야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 스스로 파리 중앙시장에서 오가는 언어에 국한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평이하게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쉽게 통용되지 않을 산문이야말로 지식의 표상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어리석은 존재로 폄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이 얼마나 강했던지, 몽테뉴는 만약에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타나는 평판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 더러운 망토를 걸치고 지극히 평범한 언어로 말을 하면서 마을에 나타나 대학의 학자들에게 다가갔다면 그 학자들의 과반수가 소크라테스를 높이 평가했을 것인지 궁금해했다. 대학의 학자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우러러본다고 고백한 인물이 소크라테스였으니 몽테뉴가 그런 생각을 품을 만도 했다.

-249~250P



삽처럼 생긴 커다란 발로 끊임없이 땅을 파는 것은 두더지가 평생 짊어진 숙명이다. 두더지의 주변에는 영원한 어둠뿐이다. 두더지의 눈이 덜 발달한 것은 단지 빛을 피하기 위해서다.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난으로 꽉 찬 일생을 통해 두더지는 무엇을 얻을까?…… 삶의 고난과 고통은 삶에서 얻는 과실이나 이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혹하다.


쇼펜하우어가 볼 때,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무의미한 생존을 위해 똑같이 전력투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운한 작은 개미들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라. 대부분의 벌레들의 삶은 자신들의 알에서 태어날 미래의 자손들을 위한 음식물과 주거 공간을 준비하느라 줄기차게 노력하는 근면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자손들이 영양분을 다 소모하고 번데기 단계로 발전하면 그들이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똑같은 일을 시작 한다……. 이런 노력으로 개미들이 무엇을 얻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허기와 성적 열정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달리 보여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약간의 덧없는 만족……. 끝없는 욕구와 진력 사이에.


3. 쇼펜하우어는 굳이 비슷한 예를 끄집어낼 필요가 없었다. 우리 인간도 사랑을 추구하고, 장래 파트너가 될 사람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고, 아기를 가지고, 두더지나 개미와 비슷한 선택의 과정을 겪으며 그런 생명체보다 별로 더 행복하지도 않다.


4. 쇼펜하우어에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비통함을 불러일으키는 헛된 기대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절대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염세적인 사상가들이 가장 쾌활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엔 타고난 잘못이 딱 하나 있다. 우리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 타고난 잘못을 우리가 고집하는 한…… 이 세상은 모순으로 꽉 찬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위대한 일에서든 아니면 하찮은 일에서든 이 세상과 삶은 행복한 존재를 지원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늙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거의 대부분 낙담이라고 부를 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랑에 빠질 때 그 사랑에 대해 적당히 기대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결코 그 정도로까지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을…… 방해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이란 살아생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가정 아래에 행복 사냥에 나서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희망은 늘 좌절하기만 하고 그로 인해 불만이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막연한 행복의 기만적인 이미지들이 변덕스런 모습으로 우리들 앞을 맴돌고, 우리는 그 이미지들의 실체를 헛되이 찾고 있다. 적절한 충고와 가르침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이 세상이 그들에게 내놓을 게 아주 많다는 식의 그릇된 관념을 털어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311~315P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 약간이라도 인연을 맺고 있는 인간 존재들에게 나는 고통과 절망, 질병, 냉대, 경멸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지독한 자기경멸과 자기불신의 고문, 패배당한 자의 열등감과 동떨어져 지내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풍부한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앞으로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를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그리고 폭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322P



니체에 따르면, 만약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과 흑』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작가들이 천재성을 결여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창작하는 데 따르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소설 작품을 남기려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쏟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훌륭한 소설가가 되기 위한 비법을 내놓기는 무척 쉽지만 그 비법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사람들이 “나는 재능이 부족해”라고 말할 때 쉽게 간과해버리는 노력의 질이 전제되어야 한다.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소설을 위한 밑그림을 100편 정도 그리되 밑그림마다 두 쪽을 넘지 않아야 하고, 또 그 밑그림에 동원된 단어들은 거기에 꼭 들어맞는 정확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일상의 일화들을 적어두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가장 충만하고 효과적인 형식으로 기록하는 요령을 터득할 때까지…… 그리고 지치지 않고 다양한 인간형과 성격들을 포착하고 묘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일상의 모든 일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연결 짓고, 또 그런 것들이 야기하는 결과에도 눈과 귀를 늘 열어두어야 한다. 여행을 할 때는 풍경화가나 의상 디자이너가 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 행동의 동기에 숙고하고, 그런 동기를 말해주는 단서를 절대 무시하지 말 것이며, 밤낮으로 이런 사소한 것들을 수집해야 한다. 이 같은 다각적인 연습을 10년 이상 게을리 하지 않은 끝에 탄생하는 작품이라야 이 세상에 내놓아도 좋을 만한 수준이 될 것이다.

-342~343P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국내도서
저자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 정명진역
출판 : 생각의나무 200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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