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섬세한 세부 묘사의 끝, <바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시집 본문
50개 시 중 끌리는 시 3개를 꼽았다.
김기택 시인의 시는 섬세한 묘사가 좋다. 나는 일상의 언어 사이에서 놓친 것들을 보려 애쓰는 데도, 시인의 눈은 정말로 비상하다. 나는 시와 같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에 서툴러,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개인적으로 산문을 선호하지만, 시인의 문장은 한없이 부럽다. 오래 바라 본 결과인 건가. 시에 대해 얘기하는 건 정말 버겁다. 함부로 내뱉지 못하겠고, 난 생각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판단이라고 판단하고. 난해하다. 생각의 표현을 누군가는 오만으로, 나는 그런 오만이 아니라고, 오해라고. 그런 오만을 저지른다. 그저 묵묵히 읽고, 생각하고, 내 안에 쟁여놓을 수 밖에.
한 명의 육체를 위하여
달려가던 승용차가 가볍게 들어올리자
사내는 조금도 꾸밈이 없는 동작으로
빙그르르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전혀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스팔트 위로 내리꽂혔다
얇은 가죽으로 막아놓은 60키로그램의 비린내
안에 들어 있던 분노와 꿈이
일제히 터진 곳에서 쏟아져나왔다
모든 것은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신속하고 완벽하게 제 위치를 찾아갔다
꿈은 흰 쌀밥 위로 오르는 김처럼
모락모락 공손하게 착하게 흰 골을 떠나
거대한 스모그 속으로 스며들었고
분노는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따라
하수도 속으로 얌전하게 흘러 들어갔다
크고 믿음직스러운 두 손이 있었으나
체온이 있을 동안만 가늘게 떨었을 뿐
곧이어 차고 뻣뻣한 힘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지 아침부터 해장 한번 잘했군
지나가던 버스 운전사가 킬킬거렸고
손바닥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들이
킁킁거리며 비린내를 향해 몰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핏줄의 끝 수만 뿌리 모세혈관으로
모여 기지개가 되고 주먹이 되고
눈동자 속에서 빛이 되어야 할 힘들이
해골을 뚫고 풀어져 사방으로 흩어져간 후
사내는 이제 진짜 육체가 된 것이다
무기력하고 아무 할 일도 없어 마냥 착하기만 한 육체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순한 육체가
가시
가지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온 힘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산소밖에 만들 줄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까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로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꼳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선거 유세
연사의 급한 마음이 튀어 침으로 나온다
침은 더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려고
입 안 가득 거품을 일으켜 혀 주위에 돌리고
꿈지럭꿈지럭 혀도 둔한 뿌리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건조한 말들은 침 속에서 자꾸 물기를 빨아들이고
혀는 지렁이처럼 점점 하얗게 말라가는 몸으로
물기를 찾아 침샘으로만 들어가려 한다
순간,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느린 혀가
미처 이빨을 피하지 못해 지끈 깨물린다
'양심'이 '야! 심!'으로 발음되어나온다
쓰린 상처에 급히 바람을 넣으며
혀는 힘차게 꼼지락거려 그 발음을 수정한다
연사는 억지로 공기를 밀어넣어
물기 없는 찐득찐득한 침을 꿀꺽 마신다
침은 목구멍에 달라붙어 말로 가려는 공기를 막는다
당황한 얼굴에 박히는 수많은 시선들
큰기침! 이어 계속되는 진짜 기침
죄송합니다 콜록 유권자 콜록 여러분 죄송합니다 콜록
마른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지렁이처럼
혀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꿈틀거려본다
드디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말에서 침이 갈라져나온다 말에서
물기가 모두 빠져나온다 말들은 뜨거워진다
뻥! 뻥! 몇 배로 튀겨진 말들이
확성기마다 쏟아져나온다 박수 소리 위에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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