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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유/인문학

<책은 도끼다> - 박웅현

온화수 2015. 11. 30. 06:31


저는 박웅현님을 좋아합니다. 그의 철학이 좋아서요. 그래서 그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박웅현님이
자신이 책에서 울림을 느꼈던 내용을 강독을 다니며 말했던 내용들을 엮은 것입니다. 제게 울림을 주는 내용이 많아서 너무 적을 게 많네요. 이 블로그가 블로그이기도 하지만, 저의 아카이브거든요. 그래서 비교적 타인을 위한 정리보다는 제 위주입니다. 


엄마, 엄마,


내가 파리를 잡을라 항깨


파리가 자꾸 빌고 있어

- 경화 봉화 삼동국교 1년 이현우, 「파리」



  감탄사가 바로 나오지요? 이건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절대 안 나옵니다. 생각해보세요. 파리가 두 발로 싹싹 빌고 있는데 어떻게 잡겠어요. 순진무구하고 신선한 시선만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예요. 내가 무심히 지나친 것을 그렇게 새롭게 봐줬다는 것이 감탄스러운 문장입니다.

 

신은 장사다


사람을 든다


- 성주 대서국교 4년 이흔덕, 「신」 중에서



  다들 신발 신고 계시죠? 어떤 친구가 신발에 대해 쓴 시입니다. 우리는 이 생각을 쉽게 못 해요. 우리의 관점에서 보니까요. 하지만 이 글은 신발의 관점에서 본 거죠. 창의적인 생각이 '뒤집어 보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아주 창의적인 발견이죠.



고기는 이상하다.


물속에서 숨을 쉰다.


- 안동 대성국교 2년 박주극, 「고기」 중에서



  이 또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본 겁니다. 어른들은 다 알죠. 물고기는 아가미가 있고, 그래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기 때문에 '지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나는 물속에서 숨을 못 쉬겠는데 물고기는 숨을 쉬니까 이상하다는 거죠.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본 겁니다.

  또 어떤 친구는 완행버스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관점의 변화가 부러운 시 중 하나인데요.



가다가 손님이 오면

고약한 직행은 그냥 가고요,


인정 많은

완행은 태워줘요.


달리기는 직행이 이기지만,

나는 인정 많은 완행이 좋아요.

-의성 이두국교 5년 박희영, 「버스」 중에서



  이 아이의 안내를 받고 보니 완행버스가 예뻐 보이더군요. 피카소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고요. 우리는 0세에서 100세를 놓고 봤을 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가면서 지식이 계속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식을 얻는 대신 가능성을 내주는 것이죠. 지식을 쌓으면서 놓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우리는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끊임없이 '신동'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곱 살에 화려하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면, 천재라고 부르면서 바로 기술을 가르치죠. 그런데 기술은 스무 살, 서른 살이 되면 멈춥니다. 오스트리아에 한 음악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학교는 음악학교인데도 어린아이들에게 악기연주를 시키지 않는 대신 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자연의 음들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 가서 자갈을 들고 큰 돌과 큰 돌이 부딪치는 소리, 큰 돌과 작은 돌이 부딪치는 소리,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얘기하는 것이죠. 이렇게 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중요한데 우리는 기술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요즘 교육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위 내용은 이오덕님의 『나도 쓸모 있을걸에 나오는 내용을 박웅현님이 느낌과 함께 설명한 것입니다. 


우린 시험만 보다 끝나요. 멀리 보고 실용적인 걸 시험보지 않고 눈앞의 등수를 가르기 위한 문제를 내고 시험을 보니까요. 시험 끝나면 대부분 써먹을 데가 없어요. 금방 잊어요. 세계 청소년 올림피아드에 나가면 우리나라는 항상 최상위권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오래가지 못해요. 우리나라는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뿐이에요.


월드컵에서도 강팀들은 예선에서 죽 쒀요. 하지만 결승에 가까워질수록 살아나요. 멀리 보고 컨디션을 맞추는 것이에요. 우리나란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달려 금방 소진돼요. 시간이 갈수록 경쟁은 속도가 아닌 '자기 것'이 있어야 오래 살아남아요.


우리 것을 채우기 위한 고민 없이, 그저 목표를 향해 열심히만 달리는 건 이젠 무의미한 거 같아요.


결국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고수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구나 싶습니다. 박재삼이, 존 러스킨이, 헬렌 켈러가 같은 생각을 했어요. 사과가 떨어져 있는 걸 본 최초의 사람이 뉴턴이 아니잖아요. 사과는 늘 떨어져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겁니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절박함이 사과를 보고 이론을 정리하게 했죠.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두 시간 강의에서, 한 권의 책으로 제가 가르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여러분 안에 씨앗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울림을 줬던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의성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모두 창의적이 되어야 하는 거죠? 저는 광고를 해야 하니까 창의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의성과 관련 없지만 가치 있는 일도 꽤 많잖아요. 그런데 이게 왜 필요하느냐, 왜 다들 굳이 배워야 하느냐? '직업'의 범주를 벗어나 '삶'의 맥락에서 볼 때, 저의 대답은 창의적이 되면 삶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풍요'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해볼까요? 풍요로운 삶이라 하면 대부분 성공한 삶을 떠올려요. 그럼 성공한 삶이 무엇이냐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한 번 해봅시다. 성공한 삶이라는 게 뭘까요? 일단 당장 성공한 삶이라면 외제차, 좋은 집, 돈이 떠오르겠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돈만 많은 사람과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의 표정을 떠올려보세요. 진짜 어떤 것이 풍요입니까? 최고의 샹페인과 캐비어를 매일 먹을 수 있는 삶이 풍요로운 삶일까요? 그가 죽을 때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만족할까요? 햇살과 나뭇잎의 아름다움 하나 보지 못해도 최고급 삼페인과 캐비어만 있으면 행복한 삶일까요? 행복은 순간에 있습니다. 중국의 옛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 작자 미상


  무시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고, 매일 로열 캐리비언 크루즈를 탈 수 있고,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야 빨리 빨리 와, 찍어, 가자"하는 사람. 그리고 십 년 동안 돈을 모아 간 5박6일간의 파리 여행에서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이라는 그림 앞에서 얼어붙어서 사십 분간 발을 떼지 못한 채 소름이 돋은 사람.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풍요롭게 생을 마감할까요?


  중요한 것은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를 보면서 소름이 돋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처음 피카소의 작품을 볼 때 왜 좋은지 몰랐습니다. 좋다니까 감동을 짜내며 좋은가보다 했죠. 그런데 지금은 좋은 걸 알겠습니다.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같은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들을 읽고 난 다음에 본 피카소의 그림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젠 앙리 루소의 어떤 그림을 보고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파리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있을 시간이 삼 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삼 일 있다가 떠난다는 걸 아니까 모든 게 난리인 겁니다. 에펠탑 봐, 이게 퐁피두래, 이게 샹젤리제 거리야. 그런데 만약 거기에서 삼십 년을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것들이 그렇게 감탄스러울까요? 대한민국, 서울,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도 들여다보면 좋은 게 꽤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니까 그 시선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번 말했 듯 그런 것들을 기르는 데 가장 좋은 것이 책입니다.


그래도 파리가 아름답기는 한 것 같아요... 제가 사는 곳도 아름답지만. 


  워홀이 얘기했던 건, "플라톤 당신은 생활이 우선이고 예술은 잉여물이다. 오스카 와일드 당신은 모든 생활은 예술을 닮고 싶어한다. 그래서 예술이 더 지상에 있다고 했는데, 아니다. 이 캠벨 수프가 내 식탁에 있으면 생활이고 액자 속에 있으면 예술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워홀은 액자 속에 캠벨 수프를 집어넣고, 영화에서 보던 생활 속의 마를린 먼로도 액자에 넣고 예술로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생활과 예술을 보는 세번째 관점을 워홀이 내놓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액자 속에는 특별한 것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즉 같은 대상인데 식탁에 있으면 생활이 되고 액자에 있으면 예술이 된다, 그러니까 '액자'가 중요해진다라는 것이죠. 이유는 사람들은 액자 속에 들어간 것은 뭔가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같은 사진도 책상 위에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만 액자 속에 들어가 있으면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죠. 만약 미술관에 누군가가 깡통을 걸어놓거나 변기를 걸어놓으면 사람들은 유심히 살피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액자라는 것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일이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죠. 그래서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는 문학적인 수프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의 속뜻을 아주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시릴 코널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죠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 반열(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것)로 격상된 셈이었다.



  사랑 이야기를 하는 책에서 워홀의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느냐면, 우리는 워홀이 통조림에 했던 발견을 자신에게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통조림은 워홀을 사랑하고 평생의 연인으로 삼을 겁니다.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요. 자기를 그렇게 아름답게 봐준 사람이 처음이니까요.(웃음) 아무도 자기를 중요하게 혹은 예쁘게 안 봐줬어요. 그런데 워홀은 '너 대단히 예쁘다'라고 끌어서 액자 속에 걸어놓아 줬어요.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다르지 않나는 얘기예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주목해주거나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진가를 알아줬을 때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 그걸 연결해서 알랭 드 보통은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사랑의 유사점에 대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합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또 공감할 만한 건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또 이 얘기도 재미있어요. 어린 여자들이 나이든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예요.



어린 여자들은 그 남자의 어떤 면을 세월이 자연스럽게 가져다주는 게 아닌 그 남자만의 장점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지 지상에 십 년 더 살았기 때문에 얻어진 서른 한 살의 성숙함은, 어린 남자들의 서투름만 봐온 스물네 살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어느 책에서 봤는데, 반대로 남자가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돈보다 사랑만을 추구하는 순수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나이 들어도 물론 있지만, 그런 사람은 주변에 의해 물들기 때문에 주관이 있는 사랑은 점점 줄어드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