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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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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온화수 2015. 2. 8. 21:31

여자 없는 남자들 이 소설에는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그 중 한 단편의 제목이면서, 7편의 단편들은 모두 여자가 없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결국 '여자 없는 남자들'은 단편들을 엮은 또 다른 제목이다.

 

  첫 단편인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내를 잃은 연극 배우의 이야기다.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눈까지 안 좋아진 가후쿠는 여자 운전사를 고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운전사에게 죽은 아내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가후쿠는 차를 정비소에 맞겼다가 미사키라는 여자 운전사를 소개 받는다. 가후쿠는 여자 운전사가 영 마뜩치 않았다. 그가 경험해 본 여성의 운전 실력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운전 실력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뉘는데, 지나치게 난폭하거나,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것.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운전 실력은 신중하지만.

 

  단골 정비소 주인의 말에 따르면 미사키는 정말 운전을 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사키의 운전 실력은 난폭하다는 게 아닐까?" 가후쿠는 지레짐작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험 운전을 시켜보니 미사키는 운전을 정말 잘한다. 가후쿠의 차는 스틱 쉬프트인데, 그 기어 변속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만큼 부드럽게 차를 잘 모는 것이었다. 정체 상태에서도 차의 엔진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줄 알았고, 그냥 만났을 때보다 운전할 때 그녀의 모습이 편해지는 것이 가후쿠의 맘에 들었다. 더구나 말수도 적었다. 그래서 운전사로 채용한다.



 

  가후쿠는 연극 배우이기 때문에 수시로 대사 연습을 한다. 혼자 운전할 때 하던 대본 연습이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에서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아무리 가후쿠가 큰 목소리와 감정으로 대사를 해도 미사키는 마치 귀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운전에 집중한다.

 

  연극 무대 외에 필요한 거 말고는 말을 아끼는 가후쿠와 온갖 말에도 꿈쩍하지 않는 미사키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다. 가후쿠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던 비밀이 있었다. 가후쿠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가후쿠가 알고 있기로는 결혼하고 나서 부인은 자신을 제외하고 만난 남자는 모두 4명이다. 4명을 함께 만났던 건 아니고, 한 명을 만나다가 끝낸다. 한동안은 남자가 없다가 다시 만난다.

 

  가후쿠는 몹시 괴로웠다. '왜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나는가?' 아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사이에 아내는 암에 걸려 죽고만다. 가후쿠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이런 이야기를 운전사 미사키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아내가 죽기 전에 만났던 네 번째 남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계획한다. 하지만 그 남자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 남자의 허접스러운 언행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이 형편 없는 놈을 아내가 만났다니.' 절망하다가, '아내는 이래서 이 남자를 떠났구나.' 이해 아닌 이해를 하게 된다.

 

  미사키에게도 어두운 상처가 있다. 그녀의 상처는 다 드러나지 않는다. 가후쿠가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그 중에서도 꼭 필요할 때만 마치 양념처럼 올라온다. 그럼으로 인해 가후쿠의 슬픈 상처는 완성되어 간다.

 

  하루키의 책을 처음 읽었다. 소설이란 것 자체를 읽기 시작한 게 얼마되지 않았고, 하루키에게 편견이 있었다. 결국 성적인 얘기만을 늘어놓는다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자주 거론되기도 하고 해서 '한 번은 읽어봐야지'란 생각에 최근 작품을 모셔왔다.

 

  두 번을 읽었다. 처음 읽을 때 정말 재미없었다. 편견대로 성적인 얘기만을 늘어놓고. 생각만큼 감성적이거나 화려한 글쓰기도 아니고 집중도 안 되고. '역시 소문대로구나'라고 느끼며 집어던졌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나름 인정받는 작가인데,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집중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까 섹스, 불륜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만을 끌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랑으로 인해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경험으로 인해 우린 평생 고독해진다. 하루키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닐까. 사랑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때의 고독은 고독이 아니다. 사랑을 하고 난 후 떠나간 그 자리에 서면 그제야 진정하면서도 영원한 고독을 품고 살아간다.

 

  다시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한다. 조명을 받고 주어진 대사를 한다. 박수를 받고 막이 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화하게는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 - '드라이브 마이 카' 60쪽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 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각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 밖에 없다.

  그 세계에서는 소리가 울리는 방식이 다르다. 갈증이 나는 방식이 다르다. 수염이 자라는 방식도 다르다. 스타벅스 점원의 응대도 다르다. 클리퍼드 브라운의 솔로 연주도 다른 것으로 들린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방식도 다르다. 오모테산도에서 아오야마 1가까지 걸어가는 거리 또한 상당히 달라진다. 설령 그후에 다른 새로운 여자와 맺어진다 해도,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멋진 여자라고 해도, 당신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녀들을 잃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 '여자 없는 남자들' 331쪽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모든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것은 오래된 지우개 조각과 아득히 들려오는 선원드의 슬픈 노래 뿐이다. 그리고 분수 옆에서 하늘을 향해 고독하게 뿔을 치켜든 일각수. - '여자 없는 남자들' 335~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