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너에겐 웃음을 주고 나는 울음을 갖고 싶다 본문

일상의 철학

너에겐 웃음을 주고 나는 울음을 갖고 싶다

온화수 2015. 11. 13. 03:03

게으른 내가 노력해서 전보다 나아진 건, 글쓰기 정도. 사실 노력도 아니었다. 내가 배운 교육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나도 답답해서, 그저 뭔가에 홀려 쓰기 시작했다. 과거엔 감성적인 글을 못 쓰는 자신을 보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감성적인 문체가 아니더라도 나만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건데. 내 글쓰기가 물론 부끄럽지만, 못 쓴다고도 생각은 안 한다. 나는 3년 전만 해도 글쓰기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책도 거의 한 자도 안 봤다. '어린 왕자'조차도 그런 내용이 있다,라고 흘려 들은 게 전부였다. 책을 늦게나마 접하게 되면서, 공부의 즐거움을 그때부터 알게 된 것 같다. 대학 졸업반이 돼서야.  

 

그 이후로 책을 꾸준히 읽고,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려 하고, 나의 주변부에서 세계로 궁금증을 확장시켰다. 그리곤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결국, 내 안의 고요한 세계가 세계보다 넓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고전에서 말하는 그런 내용.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이고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말고 자기 길을 가라고.  

 

거기서, 의문이 출발했다. 삶을 자신의 힘으로 결정하라고 하는데, 그게 뭘까. 사회적 환경이 있는데, 온전한 내 의지로 결정을 한다 해도, 그게 내가 한 결정인지, 사회가 주입시킨 결정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민 정말 많이 했다. 또한, 세상엔 자신의 힘으로 결정하지 않아도, 잘 살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혼란스럽기도 했고.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엔 구분이란 단어조차 없을 것이다. 삶의 숭고함은 임의적인 자신만의 선을 긋고, 마음의 무게를 한 방향에 두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그 누가 뭐라 하든 뒤돌아보지 않고 옳게 만들 때까지 믿고 나아가는 데 있지 않을까. 희한하게도 한국은 다수의 말을 안 들으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같지만. 

 

뒤돌아보지 않는 확신이 생기려면, 그저 겉으로 근사해 보인다거나 남들이 하라는 선택보다, 홀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람들과 어울리되, 자신과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다수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고요한 자신과 마주하면서, 글을 쓴다거나 명상을 해본다거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음이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 매일 하는 것이다. 죽기 전에 이 행동을 하고 있을까, 그런 내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근사함이 아닌 '스스로' 잘 살았다, 근사하다,라고 느낄지 질문하면서. 그럼 확신을 넘어 신념이 생긴다. 

 

내가 자란, 환경 안에서, 최대한 현실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탐구하고, 세계관을 넓히고 체득한 것들을 바탕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해외 여행을 다닐 주변의 이해와, 자신의 용기와 여유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책을 선택했다.  

 

시골도 도시도 아닌 어중간한 작은 마을에서 자라, 교육을 어중간하게 받은 나는, 책에서 참 많은 것들을 얻었다. 돈은 모르겠지만, 매번 사고의 한계랄까,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물론, 책이 아니라도,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의미가 있다. 말하고자 싶은 건, 눈 앞을 살아가는 걸 넘어 긍정적인 공동체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 욕구랄까. 책에서 시작된 배움에 대한 갈증이 생기면서 나만의 욕망이 아닌 인류를 위한 욕심이 생겼다. 콧방귀를 뀌어도 괜찮다. 정말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매번 한다. 근데 진심이다.  

 

내가 노력이랄 것도 없이, 그저 주변으로부터 칭찬받았던 것들은 대부분 엉뚱함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그런 날 신기해했고, 즐거워했다. 내가 누구 흉내를 내서 웃긴다기 보다는, 대화 중에 치고 빠지는 정도의 농담들, 그런 것들에 주변은 웃어댔고 호감을 표시했다.  

 

그런 걸 보면, 나는 분위기 파악이나 촉이랄까, 그런 것들이 평균의 남자들보다는 발달한 것 같다. 덕분에 예민한 면도 있어서 내 공간을 침범하거나 무리에 휩쓸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도 하고. 

 

나를 실제 아는 주변은 내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사회적 배경이 높은 것도 아니고, 많은 소설가들처럼 어릴 때부터 세계 문학에 관심을 가져 불문과에 진학한 것도 아니고, 국문과나 문창과 출신도 아니고, 글 관련 모임에 속한 적도 없고, 그나마 유일하게 시를 좋아하는 친구마저도 내 소설이 길다며 읽기 힘들어한다. 게다가 내 글은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자책하면서도 위안하는 내용들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현실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엉뚱하고 농담을 잘하니 인터넷 공간에서도 그런 모습을 원할 것이다. 헌데, 온통 침울한 글이라니. 그래서 현실에서 나를 먼저 안 사람들은 인터넷 공간의 나를 불편해한다. 그런 것 같다. 

 

매일 웃음과 울음 사이에서 갈망한다. 너에겐 웃음을 주고 나는 울음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