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파리가 나를 괴롭힌다 본문
자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내 왼쪽 눈에 앉는다. 축축한 느낌에 눈은 감았으나 정신은 깬다. 오른손에 기를 모으고 마음속으로 '하나 두울 세엣'을 외치며 내 왼쪽 눈을 때린다. 파리는 가뿐하게 롱 점프를 한다. 내 눈만 아프다. 때린 채로 부여잡고 있다. 눈을 떠나 내 가슴에 앉는다. 가슴을 내리친다. 파리는 저 멀리 아득해진다. 가슴까지 아프다. 쫓아내면 멀어진 사물들에 앉았다가 다시 내 몸으로 온다.
안 되겠다. 인체에 안전하고 살충성분이 오래 지속되는 그린 세이프 롱앤롱 에어졸을 든다. 그렇다. 살충제다. 1미터 앞 책상에 앉은 파리에게 분사한다. 맞았는데 날아서 스탠드에 앉는다. 또 분사한다. 또 날아간다. 모기나 벌레들은 한 번 맞으면 죽던데, 파리는 생명력이 더 강하다.
아침을 먹으러 부엌에 갔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 파리가 보이지 않는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어딘가에 떨어진 흔적도 없고, 방 문을 열어놓아서 나갔을까? 모르겠다.
내게 파리란 단어는 도시보다 파충류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프랑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간접 경험이라면 반 고흐나 고갱에 관한 다큐, 레옹, 아멜리에, 미드나잇 인 파리와 같은 영화,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인 복종을 내 방에서 본 정도.
그래서 파리에 대한 경험을 곁들어 편지를 보내지 못하겠다. 나는 힘의 싸움에 관해 잘 모른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 뿐이다. 과거엔, 나와 관계없는 연예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에너지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어떤 작가에 관한 기사에 우리나라 아이들부터 도우라는 댓글에 공감하기도 했다. 한국의 일이 아닌데도, 해외의 재난에 슬퍼하며 글을 쓰고 해쉬태그를 다는 이들을 보며 아니꼽게 생각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내 일이 될 수도 있구나,라고. 나라와 민족을 넘어 같은 인류라고 생각하면 단순하게 볼 수 없다고. 함께 웃고, 슬퍼하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다고. 내가 타인을 외면하기 시작하면, 타인도 나를 외면하고, 타인도 누군가를 외면하게 될 것이며, 그런 분위기가 점점 늘어나면 단체의 성질이 돼 버릴 것 같아서. 미래의 아들딸을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파리의 일은 전혀 딴 나라의 일이 아니다. 파리에게 관심과 아픔을 외면하면, 가까운 우리에게도 파리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사건 자체를 예방하는 것도 중요할뿐더러,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절실한 때가 아닐까. 우리가 내부에서 아픔을 겪었을 때, 외부 세계가 아픔에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보다는 무관심을 넘어 비아냥거림은 지구의 온도를 더더욱 낮출 것이다.
파리 테러로 인한 희생자를 애도합니다. 부상자의 안녕을 빕니다. 희생자 및 부상자, 그들의 가족,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에게 슬픔을 표합니다.
#PrayFor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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