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요양소
지난 20년 동안 대중매체 수용 방식의 변화 본문
과거는 ‘One Way, No Feedback’시대
일방향적인 매스미디어 중심의 시대
90년대는 민영방송사가 다시 등장하고 유선TV와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등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소수 신문사들과 방송사들에 의한 독과점 시대가 끝나고 다매체·다채널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종전에 3~4개에 불과하던 TV 채널 수가 40여 개에 달하고, 방송과 통신의 기술적 융합이 이뤄지면서 컴퓨터의 멀티미디어 기능이 크게 신장되면서 수용자 입장에서 볼 때 미디어 선택과 활용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다. 미디어 시장이 개방되어 광고주와 수용자들 둘러싼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였고 사회적 분위기도 점차 개방적으로 변모되면서 과거에는 즘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약자나 소수의 의견들도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1994년 초등학교에 입학 하였는데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항상 일요일 아침에 하던 디즈니만화동산과 같은 프로그램을 기다리며 설레인 기억이 난다. 또한 주말의 ‘가요톱텐’과 같은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재미로 일주일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프로그램 본방을 보지 못할 때에는 집에 있는 가족 중 한명에게 공테이프로 녹화를 부탁해야했던 기억이 난다.
90년대 중반 쯤에는 컴퓨터가 도스에서 윈도우로 넘어가던 체제였던 것 같다. 무지개 색깔 글씨의 도스는 나이도 어렸고 어렵기도 해서 만질 줄 몰랐고 내가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배울 때는 윈도우 시대였다. 씨디롬이 아닌 플로피디스크를 많이 사용했었다. 플로피 디스크는 1.44MB의 용량으로 CD나 이동식 디스크의 선배격인 저장매체이다. 우리집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삐삐라고 불리는 호출기가 많이 쓰였었고, 집 전화기과 공중 전화가 활발이 쓰이던 시대였다. 마이마이라고 부르던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는데 음악사에 가서 최신가요 테이프를 구입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CD플레이어도 있었지만 상당한 고가 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90년대 말에는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하였고 pc방이 속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 친구들의 집에 pc가 늘어났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이 깔리고 가정에서 고속 인터넷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메일 서비스를 기본으로 제공하고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단지 ‘정보’를 구하는 수준을 넘어 ‘생활’을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터넷 쇼핑은 20~30대는 물론 40~50대까지 고객층을 넓혀갔다. 인터넷 뉴스의 등장은 한국 미디어 산업을 뒤흔들었다. 신문과 방송이 양분하고 있던 미디어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신문, 방송과는 달리 초기 비용에 큰 부담이 없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가 우후 죽순처럼 생겨났고 이는 언론을 ‘만들기 쉬운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여러 전문지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그야말로 미디어의 홍수가 터진 것.
포털사이트도 뉴스에 관심과 투자를 집중하게 된다. ‘소스’가 늘어난 만큼 포털사이트에 제공되는 정보량이 늘어난 것. 신문, 방송, 인터넷을 막론하고 포털사이트에 뉴스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포털사이트를 통해 빠르게 뉴스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인터넷은 뉴스 소비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됐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을 강타한 ‘블로그’는 미디어 시장에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 때 생겨난 개념이 바로 ‘1인 미디어’다. 개인의 블로그와 포털사이트의 결합은 기존 뉴스가 미쳐 보지 못한 ‘세밀한’ 뉴스를 만들어냈다. 기자가 미쳐 찾지 못하는 ‘작은 뉴스’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기반한 ‘전문 콘텐츠’가 인터넷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의도 대형 공사장에서 인도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블로그 뉴스는 기존 언론까지 움직이게 만든 좋은 예다.
200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는 ‘동영상’의 시대가 열렸다. 블로그 확산의 일등 공신이 ‘디지털 카메라’였다면 이른바 ‘UCC’로 일컬어지는 동영상 시대는 값싼 캠코더와 디지털카메라의 동영상 기능과 함께 발전했다. 자기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면서 ‘업로드’에 재미를 느낀 유저들은 온갖 소식과 재미있는 콘텐츠들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시켰다. 그 백미는 ‘인터넷 생중계’였다. 2008년 ‘아프리카‘라는 인터넷 생중계 사이트에서 노트북과 와이브로망을 이용한 촛불시위에 등장한 온갖 동영상 생중계는 블로그가 만들어낸 ‘1인 미디어’ 개념을 완전히 자리 잡게 만들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실’의 발생과 ‘뉴스 보도’ 사이에 시간차는 존재했다. 이 갭(gap)이 사라질 가능성을 높여준 사건이 2008년 촛불시위에 발생한다. ‘아고라’라고 불리는 게시판은 사실상 촛불시위 ‘속보’ 사이트에 가까웠다. 발 빠른 현장 뉴스에 강한 인터넷 뉴스들도 게시판에 올라오는 소식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었다.
트위터의 등장은 이제 ‘현장’과 ‘보도’에서 오는 차이를 사실상 없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전송되는 트위터의 문장들이 ‘보도’가 되는 순간 더 이상 빠른 뉴스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회 상임위에서 한 의원이 ‘망언’을 했다면, 상임위에서 지켜보던 국회의원이나 기자가 스마트폰으로 트위터에 현장을 전하고 이것이 뉴스 사이트로 내보내 진다면, 그것은 분명한 ‘뉴스’가 된다. 트위터의 강력함은 또 있다. 국경을 넘어선 실시간 속보가 가능해 진다는 점이다. 중국 지진 발생 당시 트위터를 통한 각종 뉴스가 세계로 타전되는 속도는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웬만한 외신들이 실시간으로 이 소식을 종합해 뉴스로 만들어 내는가 하면 성격 급한 사람들은 트위터 자체에서 뉴스를 소비했다.
현재 스마트폰에 내장된 사진과 동영상 기능은 트위터를 사실상 실시간 ‘종합 미디어’로 만들어줬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리고 이것이 ‘뉴스’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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