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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철학

하루 20분 피아노 독학기 3일째 - 오래된 여동생의 피아노

온화수 2016. 5. 3. 00:01



저희 집에는 대략 15년 전에 아버지가 중고로 사 오신 피아노가 있습니다. 어린 날 여동생이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그 당시 구입한 것입니다. 


여동생은 초등학생 때만 다니다가 피아노를 더 이상 배우지 않았고 피아노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원은 보습 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함께 운영했습니다. 3층 상가였는데 2층 입구에서 양쪽으로 나뉘는 형태였지요. 2층 건물 전체가 학원이 쓰고 있었습니다. 요즘에야 남자 애들도 피아노를 많이 배우지만 제가 어릴 적엔 피아노 학원 다니는 남자 애들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다니는 남자 애들은 여성스러운 면이 보였다고 해야 하나.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보습 학원에 등록하기로 한 날, 저는 피아노 학원 쪽에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갔습니다.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으로 가면 안 되느냐고 요청했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강압적인 성격과는 먼 분이셨지만 아버지가 주신 돈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넉넉지 않은 살림에 피아노는 무슨 국영수가 우선이라는 주변의 입김도 있었습니다. 또한 남자가 무슨 피아노냐는 시선도 한 몫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저는 늘 피아노 소리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게을러서 연주하려고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대학 졸업을 하고서 저는 없던 지식에 대한, 지식보다는 지혜에 가까운 실체 없는 것들에 매료되어 갔습니다. 안정해야 할 시기에 호기심이 뒤늦게 왕성해져서 덕분에 진로가 평탄하지 않았고 때때로 우울했습니다.


그런 어둡던 시기들이 조금씩 길을 다잡게 만들었고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하는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 쉽게 배울 순 있겠지만 타인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점차 하기 싫어질 것 같고 억지로 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학원 다니게 되면 추후에는 숙제처럼 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혼자 유튜브나 피아노 어플을 다운 받아 따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코드로 음악 한 곡을 일주일 만에 치는 방법들에 미혹되어서 이틀 따라 하다가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바이엘, 체르니처럼 기본부터 해보려고 말입니다.


물론 한 곡을 잘 쳐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곁들여 멋지게 친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마는, 그런 것보다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 슈베르트의 곡을 언젠가는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요동쳤습니다. 흔치 않게 저는 클래식에 마음이 향했고 다 자라서 클래식 제목과 곡 성격의 관계가 얽혀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점차 즐거워져 갔습니다.


처음 이틀간 코드로 헛수고 한 것을 제외하고 3일 동안 바이엘부터 해보기 시작했는데 조금 전 연습하면서 새로운 걸 알게 되었습니다. 왼 손으로 쳐야 할 부분을 여태 오른손으로 치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처음엔 음계니, 장조니, 단조니, 코드니, 도레미파솔라시도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직 입문의 입문 부분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웃기지만, 직접 해보면서 음악에 대한 부분의 이해도가 높아져 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혼자서 피아노를 쳐보려 한다는 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매일 의식적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피아노 앞에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1년 뒤 정도엔 상상할 수 없는 곡을 연주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긍정해봅니다. 나이가 들수록 해보지 않은 것들, 몸이 어색해하는 것들을 억지로 깨운다는 건 생활에 치여 잃어버렸던 호기심 되찾는 일입니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새벽과 같은 피곤하지만 설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