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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철학

5년의 언어

온화수 2015. 7. 29. 20:09

 

 

요즘같이 습한 날이면 차라리 고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수분을 먹고 불순물을 뱉는 온몸은 이토록 끈적거리는데, 누르고 있는 노트북은 매끈하다. 노트북에 아이스크림이라도 떨어져 끈적해버린들 노트북 스스로는 불쾌함을 느낄 수도 없을 테니까.

노트북은 감정이 없지만, 누군가는 노트북을 매개로 감정을 재생산한다. 키보드를 누르고 있으면, 자욱한 안갯속에서 하나의 기억이 눈앞에 머문다. 흐릿하던 주변은 함축되고 굵은 빗방울 하나가 이마 위로 툭 떨어진다.

얼마 전, 지인 A와 술자리를 했다. 그에겐 5년을 함께 했던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최근 헤어졌다. 그는 헤어지기 두 달 전부터 여자친구에게 농담으로 떠날 거냐고 자주 물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여자친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말라며 시선을 흘겼다고. A는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아마 불안이 배어들었기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라고 입은 덤덤하지만 우울한 눈으로 말한다.

두 달 후, 농담은 진담으로 돌아왔고, 타인이 되어버린 여자는 A의 삶을 응원한다는 진부한 말로 떼어놓았다. A는 그동안의 신뢰가 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상대가 원하니 붙잡아 뭐하겠느냐고.

한 달이 지나고, 페이스북에 주변의 태그로 함께 이별한 여자친구의 사진이 타임라인에 떴단다. 이름을 누를 수 밖에 없었고, 어떤 남자와 기념일이라며 기뻐하는 사진이 올라왔다고. 자신과 만날 때 이미 그 남자와 연락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믿어왔던 그녀가 헤어질 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나. 서로가 부서질 때마저 끝으로 응원한다던 그녀의 흔들리던 동공이, 믿음으로 점철된 5년의 최종 언어였다. 소중했던 과거지만, 마지막이 솔직하지 못했기에 허무함이 너무나 선연하다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감정이 식은 거. 그냥 질려버린 거야. 5년이면 할만큼 한 거 아니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A의 세상 다 산 껍데기를 보니 도리가 아니었다. "지금 힘들다고 떠날 사람이면 나중에 어차피 떠날 거야. 잘 됐어."라고 위로할 수밖에.

A의 눈은 무감각해 보인다. 흰자위 마저 어둠이 덮었다. 그의 세계와 현실을 이어주던 매개체, A의 그녀는 쾌락을 넘어 베아트리체였다고. A는 이 말을 하고나서 "이런 표현 존나 재수 없지?다른 데서 하면 또라이로 볼 거야."라며 냉소로 민망함을 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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