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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요양소
"아빠, 세상은 아는 게 힘이야? 모르는 게 약이야? 어떤 게 맞는 거야?" "음... 같이 고민해보자."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돈벌이와 개인의 수양이랄까, 그런 것에 관해서는 아는 게 힘인 거 같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세상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려는 것도 안 좋은 거 같고. 요즘 같은 상황이면 모르는 게 약일 수 있어. 솔직한 부모의 맘을 말한다면 현실을 직시하는, 안정을 위한 부분은 아는 게 힘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건 외면했으면 좋겠어." "왜? 세상 돌아가는 걸 알면 좋은 거 아니야?" "밥벌이를 위한 공부를 넘어 세계와 인간을 알기 위한 공부를 하는 순간, 그 삶은 평범하지 않게 되니까. 이미 세상의 불완전함을 알아버렸으니, 평범하다고 믿고 있는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지. 스스로 가..
내가 케이팝스타를 보는 건,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진 참가자들에게 놀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박진영, 양현석, 유희열 세 심사위원에게 놀라기 위해서다. 특히 박진영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나는 가수가 되려는 사람은 아니지만, 창조하는 삶을 지향하기에 박진영의 참가자들에 대한 조언들은 내 얘기 같다고 느껴진다. 지금보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을 때, 그런 조언들을 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어를 읽을 뿐, 독해란 단어의 느낌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뛰어난 가수들을 왜 따라하느냐고. 한영애 같은 가수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자기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자기 안의 내면의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내면의 유일한 내가 되라고. 그 성격과 목소리를 바탕으로 자..
자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내 왼쪽 눈에 앉는다. 축축한 느낌에 눈은 감았으나 정신은 깬다. 오른손에 기를 모으고 마음속으로 '하나 두울 세엣'을 외치며 내 왼쪽 눈을 때린다. 파리는 가뿐하게 롱 점프를 한다. 내 눈만 아프다. 때린 채로 부여잡고 있다. 눈을 떠나 내 가슴에 앉는다. 가슴을 내리친다. 파리는 저 멀리 아득해진다. 가슴까지 아프다. 쫓아내면 멀어진 사물들에 앉았다가 다시 내 몸으로 온다. 안 되겠다. 인체에 안전하고 살충성분이 오래 지속되는 그린 세이프 롱앤롱 에어졸을 든다. 그렇다. 살충제다. 1미터 앞 책상에 앉은 파리에게 분사한다. 맞았는데 날아서 스탠드에 앉는다. 또 분사한다. 또 날아간다. 모기나 벌레들은 한 번 맞으면 죽던데, 파리는 생명력이 더 강하다. 아침을 먹으러 부엌에..
절여진 집마다 화가 피었다. 화 피는 집에 파란 배추가 비치어, 젖은 앞머리처럼 축 쳐진 집들은 결박된 남편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니 아빠는 뭐한대니..."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성토를 했다. 아빠에게 부탁한 배추가 없다며. 우리는 배추밭이 있다. 엄마가 아빠에게 아침에 따달라고 부탁을 하고 확답을 받았다고 했다. 이미 주변 아주머니들과 김장 일정은 잡아놓았는데 배추가 보이질 않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니 아빠는 말만 번지르르 해. 말이나 꺼내지 말던가." 비가 추적추적 추적 60분의 음산한 분위기처럼 쏟아졌다. 엄마는 야밤에 배추를 따겠다며 중무장을 하고 하우스로 향했다. 나는 엄마를 말렸다. "비 오는 데 어딜 가. 내일 아빠한테 말해." 엄마는 아빠..
게으른 내가 노력해서 전보다 나아진 건, 글쓰기 정도. 사실 노력도 아니었다. 내가 배운 교육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나도 답답해서, 그저 뭔가에 홀려 쓰기 시작했다. 과거엔 감성적인 글을 못 쓰는 자신을 보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감성적인 문체가 아니더라도 나만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건데. 내 글쓰기가 물론 부끄럽지만, 못 쓴다고도 생각은 안 한다. 나는 3년 전만 해도 글쓰기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책도 거의 한 자도 안 봤다. '어린 왕자'조차도 그런 내용이 있다,라고 흘려 들은 게 전부였다. 책을 늦게나마 접하게 되면서, 공부의 즐거움을 그때부터 알게 된 것 같다. 대학 졸업반이 돼서야. 그 이후로 책을 꾸준히 읽고,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려 하고, 나의 주변부에서 세계로 궁금증을 확장시켰..
지나온 날이 지겨워 소주와 맥주를 섞었다. 문득 어린 날의 나를 떠올려봤다. 어린 날에는 바닥에 있는 흙 가지고도 즐거울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다. 돌이 예쁘면 집에 가져와 모으기도 했고, 둥글지만 각자의 모양이 다른 것들, 다양해져 가는 기쁨이 있었다. 서른에 근접한 나를 바라본다. 자극적인 경험이 아니면, 재미를 느낄 수 없고, 취해야 세상이 겨우 즐거워진다. 과거 술을 꽤 좋아해서 혼자 자주 마시기도 했다. 세상에 각자 개별의 존재로 취하는 건 너무나도 서늘한 일이다. 허무하고 쓸쓸하다. 사람들과 주로 마시게 된다. 개별이 아닌 눈 앞에 함께 취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현실 밖의 달콤한 또 다른 세계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취해서 감정을 쏟아내는 글을 쓰는 재미도 있었는데, 이제 더는 그 분도 술이 세졌..